(암전)
“여기는 군생활 구역으로서 당장 민간인 접근을 제한합니다. 여기는 군생활 구역으로서 당장 민간인 접근을 제한합니다.” 확성기 너머로 자동응답기처럼 똑같은 말이 울려퍼지고 있는 이곳은 제주 강정 해군기지와 멧부리가 철조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맞닿은 땅이다. 상체를 드러낸 유령처럼 분장한 여성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긴급하게 군인들이 모여든 모양이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서있을 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군사기지 앞에서 가슴을 드러낸 여성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당한 몸 가까이 가는 것이 두렵다. 순비기 나무가 옆으로 누워 길고 얇은 팔로 땅을 덮고 있는 이곳에 그녀가 은빛 몸으로 서있다. 한 다리로 균형을 잡고 나무처럼 꼿꼿이 선 등과 어깨 위를 따라 뻗은 팔이 보이고 손 끝에는 길게 자란 날카로운 손톱이 손거울을 움켜쥐고 있다. 살갗 위로 반짝이 가루와 구슬들이 빛나며 지는 해를 반사하는 그림자 뒤로 군인 두 세 명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성거린다. 다가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사람들. 지킬 수도 쫓아낼 수도 없는 장소.
‘서울에서 오신 예술가분들 Ghost sunset’은 웅장한 음악과 함께 아름다운 강정천과 멧부리, 해군기지와 강정 앞바다를 번갈아 비추는 풍경으로 시작한다. 거울을 들고 ‘고스트 댄스’를 추는 모습과 해군기지를 파노라마로 비추는 장면이 매끈하게 편집된 이것은 퍼포먼스 비디오일까. 하지만 곧 음악이 꺼지고 암전 이후 이어지는 본 영상은 웅성거리는 소음과 흔들리는 카메라, 그리고 ‘불청객들’을 보여주는 퍼포먼스 프레임 바깥을 비춘다. 현장에는 음악 대신 “찍지 말라고 해” 하는 명령어와 무전기 소리, 작지만 끊기지 않고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대치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조명)
“배경이 군사시설이다보니까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에 의해 군사시설을 찍으면 안되니까)” 찍지 말라는 말소리가 들린다. 철조망 뒤에 있어 누가 말하는 건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저희가 기지를 찍는 게 아니고 이 바다의 일부가 기지인 거라서요” 라는 말이 이어진다. ‘기지를 찍고 싶은 게 아니라 원래 기지가 오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멧부리를 찍고 싶은데, 강제적으로 기지가 건설되었고 배경으로 나오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어서 나오는 “군사보호구역이라서 사진촬영이 안된다” 라는 말은 앞에서 했던 말의 반복이고, “기지가 아니라 여기(멧부리)에서 하고 있다”, “우리가 서있는 곳은 기지가 아니라 멧부리다” 라는 대답도 앞에서 했던 말의 반복이다. 말들을 이어보니 두 목소리가 대화의 언저리에서 공회전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서로가 같은 말을 반복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이상한 장면. 분명 ‘말’을 하고 있는데 이쪽의 ‘말’들이 저쪽의 ‘말’들과 전혀 만나지 않는 대치상태. 이런 장면을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다.
‘현실을 반영하지도 구성하지도 못하고 헛도는 법의 언어’와 대치하는 ‘생존을 요구하는 삶의 언어’, ‘모호한 거절’과 ‘명확한 요구’, ‘앞뒤가 맞지 않는 진상규명’과 ‘정확하고 날카로운 반박의 근거들’,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해명’과 ‘눈에 비친 세계를 이미 간파해버린 선언문’. 대치하는 몸들은 사라지더라도 대치하는 말들은 발췌되어 어딘가에서 떠도는데, 과거가 된 이미지 텍스트 속에서 이렇게 말들의 투명함이 보일 때가 있다. ‘서울에서 오신 예술가분들 Ghost sunset’은 군사기지 앞에서 ‘사진 몇 장 찍는’ 예술 작업처럼 서있을 뿐인 몸에 ‘반응’하는 세계를 카메라로 담는다. 말하고, 서있고, 듣고, 응시하고, 버티고, 방해받고, 저항하며, 함께 서있는 몸들에 세계가 ‘반응(reaction)’하는 순간. 그리고 그로 인해 그저 서있는 것이, 말거는 것이, 응시하는 것이, 침묵하는 것이, 응답하는 것이 ‘행동(action)’이 되는 순간까지. 퍼포먼스 바깥의 퍼포먼스를 향해. 찰칵.

서울에서 오신 예술가분들 Ghost sunset, single channel video, 7:44, 2022
<불러내는, 악 Appellant, ARGH!>, <고스트 리허설 Ghost rehearsal>, <고스트 댄스 Ghost dance> 등 그간 몸의 수행성이 중심이 되는 퍼포먼스들을 이어온 흑표범의 작업 속에는 항상 ‘말’이 존재했다. ‘몸이 말한다’는 명제 속에서 나타나는 은유로서의 말이 아닌, 실제로 입으로 소리내며 등장하는 발화행위로서의 말. 대화, 낭독, 합창, 고함, 고백, 선언. 말을 하는 행위는 흑표범이 함께 몸을 움직일 존재들과 작업에 선행하는 교감의 과정이었고 워크숍이자 리서치이자 작업의 재료이며 동시에 결과물로서 존재했다. 그렇게 밖에서 말을 거는 행위에 의해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난 말들은 어떤 식으로든 몸 안에서 무언가를 갖고 밖으로 나와 다른 이의 말들을 찾아갔다. 그 여정 속에서 흑표범 자신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몸을 북돋고 말할 수 있도록 타인과 자신의 몸을 단련해왔다.
이번 개인전 <불청객 Uninvited>은 그간 여러 모양으로 작업 속에 존재해왔던 ‘말’의 모습이 현장을 배경으로 더 전면에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는 동료들이 있다. ‘서울에서 오신 예술가분들 Ghost sunset’이 퍼포먼스하는 몸을 등장시켜 대치하는 현장의 말들을 불러냈다면 ‘스틸, 강정 Ghost sunrise’은 시간이 흐른 후 퍼포먼스를 찍었던 장소를 다시 방문하며 ‘예술 이후’에도 나란히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장과 사건을 통해 동료로 만나면서 함께 만들어낸 예술 이후, 작업 이후, 전시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갈 수 있는 공통의 삶과 각자의 삶이 나란히 남아있음을 그들은 자연 속에서 느낀다.
여성, 우정, 환대, 친밀감, 운동, 응답, 연대, 공동체, 이것들은 미완성의 단어들이다. <새로 태어난 여성 La Jeune Nee>(1975)에서 공동저자 카트린 클레망과 엘렌 식수는 ‘지배하지 않는 지식의 전달이 가능한가? 그것과 ‘여성적 글쓰기’, 혹은 ‘여성적 말하기’는 양립가능한 것일까?’를 논쟁하는 대화에서 뚜렷한 공통된 결론을 보지 못한다. 저널리즘과 정치운동에 몸담았던 클레망은 글쓰기가 개인적인 행위에 불과하며 사회 구조적인 변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비판하고 계급투쟁과 같은 정치적인 행위가 필요함을 역설하지만,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 가까웠던 식수는 언어의 힘과 예술적 상상력을 긍정하며 난해할지라도 여성적 글쓰기를 변혁의 원동력으로 강력하게 믿는다. 각각 정치적 운동, 학문 영역이라는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저자의 견해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이지만 이 둘은 ‘혼자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새로운 경지에 이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마지막 장인 3부 ‘교환’에서 둘 사이의 대화를 필사하여 남겼다. 둘 중 어느 한 사람의 글로 마치거나 종합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각자의 목소리가 내는 차이를 존중하며 두 개의 목소리로 공동 작업을 끝맺는 것이다. 그것은 대치하는 말들이라기보다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염두하며 나란히 걸어가는 말들의 뒷모습이다.
기획자 최혜영은 전시글에서 “서로를 대상화하지 않고 어떻게 관계맺을지 고민해나가는 과정”으로서 전시가 만들어졌다고 썼다. 그 말 속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고민하며 시작된 만남이 단지 더 큰 무엇을 위한 것만으로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스틸, 강정 Ghost sunrise’에서 올해로 강정에 온지 십년을 바라보는 활동가 혜영과 흑표범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강정 앞바다를 바라보며 멧부리를 걷는다. 그 짧은 산책길에서 둘은 멧부리의 과거 기억, 현재의 모습, 앞으로 변화할 모습에 대한 염려를 나누지만 대화의 대부분은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사들이 채우고 있다. “저쪽 앞쪽에 태양을 보러 가보자!” “와!” “가까이서 보면 더 예뻐!”
많은 현장이 장기화되는 시대라고들 말한다. 현장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많은 논란과 갈등을 목격하고 경험하기도 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다양한 말하기 방식이 필요하기에 현장은 예술가를 필요로 하지만 예술가는 때때로 당사자성과 정치적 올바름 앞에서 사건을 대상화하고 소재화한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서울에서 오신 예술가분들’이라는 극존칭 호명은 예술이 현장에서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 어떤 식으로 침범받을 수 있는지, 제지당할 수 있는지,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는지, 혹은 장난 취급받을 수 있는지 그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단어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에, 부딪히고 실수하고 갈등하고 다투고 후회하기도 한다. 장소를 침탈하고 현장을 밀어내는 공권력과 부당한 힘을 ‘불청객'이라고 부르며 만났지만 ‘불청객’이라는 말은 때때로 그곳에서 함께 싸우는 서로를 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단순했을 것이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 이를테면 ‘아, 저기서 내가 퍼포먼스를 하면 좋겠다!’, ‘여기서 흑표범 작가가 고스트 댄스를 추면 얼마나 센세이션할까?’ 고민은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현장과 장소와 사람들과 자연을 만나며 처음 생겨났던 마음을 다듬고 재질문하고 의심하고 고치고 확신하고 실행하는 과정. 반복되는 움직임과 목소리들로서 아직은 뭐가 될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어가기 위해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주춤하는 시간, 질문이 질문을 만드는 시간. 그 시간의 두께를 보여주는 전시 <불청객 Uninvited>은 퍼포먼스가 어떻게 스스로 구성되는지가 아닌, 퍼포먼스가 어떻게 해체, 분산, 노출, 실패하는지, 그 부서진 자리에서 어떻게 말하는 몸으로 돌아오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까지 어떻게 예술의 현장으로 가져올 수 있는지 사유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멀고도 가까운 거리에서, 가끔 멀어질수도 있지만 어딘가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는 동료가 있다는 생각만으로 혼자서도 걸어갈 수 있는 힘에 대한 이야기이다.
(암전)
글을 맺으려다 기지와 멧부리 사이의 현장에서 말과 말의 대치상태가 이어질 때 계속 들리던 소리, 조용하지만 낮고 길게 울리던 풀벌레 소리를 떠올린다. 전시장 한 켠 멧부리의 순비기 넝쿨을 닮은 종이풀이 누워 있었다는 것도 떠올린다. 인간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진 다음에야 동물, 그리고 식물, 자연, 사물 이렇게 순차적으로만 사고가 가능한 익숙함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이런 사고의 순서는 인간중심적인 글쓰기 방식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사유의 범주에 뭔가를 하나씩 추가할 때마다 나타나는 여러 비가시화된 권리의 전제들을 마주하게 하며 글의 마지막에라도 다른 목소리의 자리를 염두하게 한다. 이제부터는 가정법의 말들이다. 인간은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지만 돌과 땅과 흙과 오래된 나무의 수명을 기준으로 아주 긴 시간 속에서 돌아본다면, 잠시 ‘소리내고’ ‘움직이고’ 사라지는 짧은 장면의 일부일 것이다. 어쩌면 역사라는 긴 영화 속에서 찰나의 빛 같은 것일 수 있다. 그 짧은 순간 어떤 장면에서는 시위를 하고, 어떤 장면에서는 철조망에 현수막을 걸고, 어떤 장면에서는 맨몸으로 나무를 껴안고, 또 백팔배를 하고 또 기도를 하고 또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장면의 반복 끝에서 어떤 영화가 상영될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닐테지만, 나란히 걸어간 발자국들이 그곳을 향해 찍혀있길 바랄 뿐이다.
(조명)

스틸, 강정 Ghost sunrise, single channel video, 9min, 2022
*이 글의 제목은 리베카 솔닛의 책 <멀고도 가까운 The Faraway Nearby>(부제: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에서 가져왔다. 책 속에서 솔닛은 어머니와 딸 사이로 은유되는 창작자와 작업물 사이의 관계, 이야기를 만드는 현실과 현실을 만드는 이야기, 불가능해보이는 것과 변화가능한 것 사이의 거리, 나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 사이의 연결점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제목이 품은 의미들이 이 글에서도 적용되고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흑표범 개인전 <불청객>(2021) 비평글
길은 서로 참조하며 나아간다.
*
들리지 않는 것, 인간의 언어로 소통할 수 없기에 지각하지도 못했던 식물의 언어에 대해 글의 마지막에 덧붙였다. 이런 식의 구성 자체가 나의 사고의 한계를 드러낸다. 가능성, 미래, 막연한 것, 모호한 것을 마지막에 이야기하지 않는 방법, 순환하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글쓰기 방식이 필요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