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협업자』는 시각예술가 흑표범이 퍼포먼스로 불러낸 다양한 협업자들의 목소리를 책이라는 사물로 엮어보는 출판 프로젝트다. 시간을 통과하며 흩어지고 합쳐지고 선명해지고 다시 희미해지기를 반복하는 목소리들이 분명 이 세계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이 책을 추동했다. 이 책은 2004년부터 2023년까지 이어져 온 흑표범의 작업들을 뒤돌아보며 걷는다. 하지만 지나간 작업들을 작가론으로 요약하거나 미학적 의미를 덧붙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소수자의 목소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흑표범의 작업을 길잡이 삼아 그가 직관과 우연으로 마주한, 직시한, 선택한, 감각한 한국 사회의 시공간을 돌아보고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의미를 문화 정치적 차원에서 길어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길이 유일한 길은 아니겠지만 그 길 위에서 예상보다 많은 존재를 만났고 그 만남들이 미래의 시간을 구성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문화 현상으로서 미술 작품이 갖는 의미와 그것이 만들어지게 된 사회적 구조, 그리고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시대상, 우리가 공유했던 감정 구조와 정동의 정치를 조금이라도 감각할 수 있길 바랐다.
이러한 기획 아래에서 이 책이 주목하고 있는 건 제목에서도 암시하고 있듯이 퍼포먼스 기록 안에서 맴돌고 있고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말, 바로 그 말이 남긴 감정과 기억이다. 말의 흔적을 확인하고 그 흔적이 다시 읽히고 발화될 때 여전히 어떤 힘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 했다. 침을 삼키고 혀를 말고 입술을 움직이고 입을 벌리는 무의식적인 동작 속에서 어떤 소리가 생성되고 순식간에 사라질 때, 그 일회적인 발화 행위가 만들어내는 무형의 어떤 것이 귀를 통해 몸에 들어오고 울릴 때 과연 몸을 둘러싼 세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괴롭게 하고 기쁘게 하고 거리로 나가게 하고 숨게 하고 도망치게 하고 깨닫게 하는 말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모른 채로 다시 말하고 듣고 기억하고 망각하며 살아간다. 지금도 많은 말들이 곳곳에서 생성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지나간 말들을 다시 읽고자 책이라는 사물로 남겨진 것들을 엮는다. 이 책은 퍼포먼스를 기록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로서, 그간 주로 집중되곤 하던 퍼포먼스의 몸 이미지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그 몸이 어떤 말들을 삼키고 어떤 말들을 다시 세상에 뱉어낼 수 있게 추동했는지 사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퍼포먼스라는, 작가의 단독적이고 개별적인 짧은 사건 이전에 그것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과 행위의 여정을 더 길게 묘사해보는 것일 수 있다. 이는 퍼포먼스 과정 전반에서 작업의 재료이자 영감이자 원동력이었던 협업자들의 목소리를 함께 수록하며, 행동의 의미를 다른 방향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흑표범은 한국 사회의 공적 시간과 소수자 운동의 시간이 만나는 지점을 예민하게 감각하며 많은 경우 협업으로 작업을 이어 왔다. 보통 어떤 작업이 소개될 때 예술가만이 부각되는 흐름이 주를 이루면서 협업자들의 몸짓은 편집되거나 주변화되기가 쉽다. 그러나 예술가와 협업자 사이의 마주침과 얽힘의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꽤나 중요하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미술이 마주하는 윤리와 책임의 문제를 작품 바깥으로, 예술가뿐만 아니라 관객과 독자의 영역으로 확장하게 하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프로젝트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 흑표범의 작업들이 수많은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대화와 워크숍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에 집중하며 이 책은 각각의 작품들이 지닌 관계망을 노출한다. 그것은 결과이자 완성된 작업만을 조명하기보다는 과정적이고 상호적인 맥락에서 파생된 ‘서브텍스트’의 비중을 키워 작품을 다시 보는 것이다.1 작가나 작업보다 덜 중요해서 서브인 것이 아니라, 작업을 그 시작부터 추동하고 지지하고 받아주는 목소리들이기에 서브이며, 결국 결정적으로 이 서브가 전체를 연결 짓는 매개이자 토대임을 기록하려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일종의 서브텍스트로서 조명하는 사진, 대화 기록, 연습용 비디오 이미지, 인터뷰, 그리고 워크숍 기록,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 등을 읽는 과정에서 다시 불러내어지는 것은 함께 눈 마주치고 입을 움직이고 몸을 접촉하며 생각을 공유했던 협업자들의 존재이다. 예술 작품이 결과로서만이 아닌 과정으로서도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시작과 과정 속에는 항상 시대적 맥락과 감정 구조, 정동, 관계망, 무엇보다 동료가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며 이 책은 협업자들로 이루어진 2010년대 미술의 궤적을 일부 돌아본다.
〈입 속의 협업자〉에는 크게 네 방향의 목소리가 교차한다. 먼저 한국 사회에 어떤 감정 구조와 정동, 사건, 이야기, 소문들이 존재했는지 설명하는 짧은 글이 각 장의 시작 부분에서 입을 뗀다. 그리고 흑표범의 주요 퍼포먼스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정오의 목욕〉, 〈VEGA〉, 〈불러내는, 악〉, 〈고스트 댄스〉, 〈고스트 리허설〉, 〈고스트 선셋〉, 〈고스트 선라이즈〉, 〈비행공포〉가 응답한다. 흑표범이 연출하고 편집한 이미지와 텍스트들 사이로 흑표범의 작업 속에 등장했던 협업자들의 목소리(말, 인터뷰, 대화, 몸짓 등 워크숍 자료에서 발췌)가 책의 곳곳에 등장한다. 이 목소리들은 정리된 한 편의 글로 연장되기보다는 단어, 문장, 의성어, 감탄사처럼 분절되어 책의 곳곳에 끼어드는 형식을 취한다. 소리가 중요한 음성의 경우 큐알코드로 배치했다. 이와 함께 흑표범의 작품을 미술 평론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여성적 글쓰기, 수행성, 공동체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쓴 필자들의 글이 따라온다. 각 필자는 자신 또한 글과 사진, 희곡, 영화 등으로 창작하는 입장에서 탐구해 온 주제를 흑표범의 작업을 매개로 풀어냈다. 흑표범과 비슷한 고민을 품은 이들이 그의 작업을 이어받기라도 하듯, 이에 응답하고픈 이야기를 에세이, 시, 편지 등 여러 형식의 목소리로 전달한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예술가 흑표범의 목소리, 한국 사회라는 목소리, 협업자들의 목소리,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목소리, 이렇게 네 개의 축이 서로에게 화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여러 목소리들이 만나고 또 중첩되는 층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구조가 필요했는데, 이를 책 디자인을 통한 수행적 실천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흑표범의 작업은 무엇보다 자신의 이미지를 반복해서 참조하고, 타자의 목소리와 얼굴을 자신의 작업에 사용하는 인용의 방식이 중요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작업들은 여러 형태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섬세한 연결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작업과 작업 사이에 연결의 이미지, 텍스트들을 남겨보았다. 하나의 작업에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는 장을 유심히 읽는 이의 눈에는, 그렇게 연결되며 나아가는 인용의 흔적이 눈에 띌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이 2010년대를 요약하거나, 흑표범의 작업이 2010년대의 사건들을 망라하는 작업을 한 것으로는 비치지 않길 바란다. 이 책은 타자와의 만남에 실패했던, 하지만 더 잘 실패하는 방법을 찾아 헤맸던 흔적들이다. 흑표범은 자신의 지나간 작업들을 설명하며 ‘실패'라는 단어를 자주 이야기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대화가 흘러가지 않을 때, 자신이 준비한 도구가 다른 형태로 모양을 바꿀 때, 준비한 동작으로 움직일 수 없을 때, 자신이 지닌 어떤 중심이 기울어진 축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는 실패했다. 하지만 실패하는 과정 속에서 더 많은 것을 건져 올린다. 우리는 수많은 사건들과 당사자성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스치는 순간들의 접점에서 마주했던 장면들을 통해, 한 명의 개인이자 시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자 한국의 예술가, 여성이라는 젠더 정체성을 지닌 이가 통과한 시간을 경험할 것이다. 이 책이 흑표범의 작업에 대한 것이어야 했던 이유는 흑표범의 작업들이 단지 흑표범만의 작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흑표범의 작업들을 매개로 돌아본 우리의 2010년대는 우리에게 다시 무엇을 남길까. 이 책은 그런 질문에 함께 응답하길 제안하면서 잊힌 것들을 다시 기억하고자 한다.
책의 제목 ‘입 속의 협업자’는 분명 기형도의 시 ‘입 속의 검은 잎’으로 상징되는 예술의 의식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말한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2 여기서 입 속의 검은 잎은 1980년대라는 어두운 시대상 속에서 천재 남성 예술가로 대표되는 개인 창작자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양심의 무게, 표현의 두려움, 시대에 대한 답답함과 무력감 등을 암시한다. 흑표범의 작업은 광주에서 시작하여, 세월호, 이주 여성, 퀴어, 장애, 군사주의, 비인간 존재와 같은 한국 사회의 여러 소수자 이슈들을 거쳐 여러 ‘입 속의 검은 잎’들을 만나는 작업으로 이어져 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술가가 단독적으로 만들어내는 성과로서의 예술이 아닌 협업과 관계망, 친밀감, 우정 속에서 만들어진 공동 작업으로서의 페미니즘 미술, 행동주의 미술을 가시화한다. 여전히 입 속의 무언가를 표현하고 전달하고 응답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혼자 무겁게 가라앉고 불타오르고 굳어가던 입들이 서로를 우연히 만나고 접촉하고 섞이고 뒤엉키는 일이 일어나기도 할 것이다. 입 속에서 접촉하고 밀어내는 말들, 끈적하게 붙어서 섞여버리는 말들을 기록하며 이 책은 예상치 못한 말들, 곧 불러내어질 말들 또한 이곳에서 기다리고자 한다.(『입속의 협업자』 들어가며)
1. 《해피아워》로 잘 알려진 영화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의 백그라운드에 놓인 보다 장대한 텍스트의 세계"를 서브텍스트라고 호명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과거 관계성과 영화 바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을 담기 위해 영화의 전후 과정에서 인터뷰나 추가 각본을 쓰곤 한다. 그것은 각본 이외의 텍스트이고 작품 안에는 담기지 않지만 영화라는 세계와 영화 바깥의 세계가 단절되지 않고 어딘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자 바람으로 읽힌다.(하마구치 류스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 모쿠슈라, 2022, p6.)
2.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p68.
『입속의 협업자』, 흑표범, 전솔비, 노순택, 한진오, 김영옥, 그레이스김, 희음, 안팎 공저, 토탈프레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