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노래가 닿았다’고 말하는 순간 ‘여기 장벽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사실’이라고 적었지만, 누군가는 ‘느낌’이라고 말할 테고 누군가는 ‘상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장벽을 감각하는 경험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노래가 장벽을 드러내는 조건이며 장벽이 노래를 발생시키는 조건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것과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것의 만남이 반복되면 결국 양쪽 모두를 움직인다. 멈춤과 움직임 모두를 향한 끈질긴 응시는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상반되는 문장들 또한 흔든다. 노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장벽은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나란히 적힌 채 서로를 밀어내는 문장들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 장벽이 노래를 위한 넓은 반향실을 만들고, 노래는 장벽과의 밀고 당김 속에서 자신의 소리를 조율해 가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어서 장벽으로 건축된 견고한 세계가 자신의 몸을 드러낼 것이다. 어떠한 소통 방식도 어떠한 표현 방법도 가능할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며 ‘자유로운 세계’라는 수사 안에 숨겨온 현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결국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게 만드는 현실. 그 현실을 들추자 수많은 노래 아닌 노래들이 음소거되어있고, 세계의 무표정이 여기를 응시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자 느낌이자 상상이다. <여기 닿은 노래>는 노래를 통해 항상 여기에 있던 벽의 존재를 가시화하며, 벽이 여기 있다는 정보를 감각한 후에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노래들을 충실히 그러모으고 있다.
청각장애인의 언어와 농인의 언어에 관한 탐구를 통해 인간 조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내고자 했던 의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는 우리가 은연중에 어떤 언어 구조를 자연화하곤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 아래에서 미술관은 비장애인 중심의 시청각 언어가 소통 수단의 전부가 아니라고 하며, 그림, 표정, 춤, 노래, 느낌, 접촉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우리가 소통할 수 있다고 하지만 ‘표현된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소통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점을 감추곤 한다. 예술은 언어에 속박된 인간 존재들이 다른 표현으로 언어의 구조를 넘어보려는 분투이지만, 예술이 전시장 안에서 다른 인간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구조에 의지해야 한다는 모순을 결코 숨길 수 없다. 그러니 일상에서 우리에게 깊숙이 영향을 미치며 누군가를 좌절하게 하고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소통의 장벽을 미술관이 또렷하게 가시화하는 일은 아무리 반복해도 충분치 않다. 같은 것을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반복 속에서 다른 것을 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반복을 수행하게 한다. 반복을 결심한 전시장에는 수많은 장벽과 노래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장벽과 노래를 인지하게 하는 언어도 가득 차 있다. 가득 차 있다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적었지만, 누군가에겐 단 하나의 언어만 감각될지도 모르며 언어가 부재하다고 느끼는 존재가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반복은 끝나지 않는다. 아키타입(이지원)의 감각 지도는 비장애인 중심의 시청각 언어 구조에서 소통의 부재를 느끼는 다양한 몸들을 위한 여러 모양의 언어가 되어 전시장에 들어오는 문에서부터 나가는 문까지 곳곳에서 존재감을 알린다. 전시장에 놓인 쉬운 글 해설, 음성 해설, 점자 텍스트, 묵자 텍스트, 자막들은 ‘자연스러운 소통 구조’라는 것의 폐쇄성을 지적하고 다른 언어를 제안하며 이를 통해 작업으로 향하는 여러 방향의 경로를 만들어낸다.
1층 전시장 가운데에 놓인 라움콘의 <과정의 과정>은 일상의 과정과 작업의 과정에서 쌓인 감정들의 발화를 보여주고 있다. 드로잉과 텍스트 아카이브들 속에서 한 장의 종이가 눈에 띈다. 종이에는 세 개의 원이 그려져 있다. 양쪽 끝에 ‘말’이라고 써진 원과 ‘뜻’이라고 적힌 원이 있고 사이에 또 하나의 원이 보인다. 거기에 적힌 글자는 덧칠로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지만 추측건대 ‘뜻’이라고 적혀있을 것이다. 소통의 과정 속 매끄럽게 전달되고 전달받는다고 상상되는 말과 뜻 사이에는 ‘늘’ 하나 이상의 장벽이 있고 그것을 지나가야만 뜻에 도달할 수 있다. 상대의 말과 내가 이해한 뜻 사이에 내가 이해하지 못한, 혹은 감각하지 못한 어떤 ‘뜻’이 남아있다는 불안감. 내가 보낸 말과 상대가 이해한 뜻 사이에 내가 원래 보내고자 했던 ‘뜻’이 행방불명된 채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답답함. 말과 뜻 사이에 어떤 장벽도 없이 매끄럽게 소통되는 것처럼 가장하며 들은 척 이해한 척하는 세계에 대한 불편함. 축적되는 감정들은 여기에 무수히 많은 드로잉으로 펼쳐지며 ‘말’과 ‘뜻’ 사이에 놓인 단일한 경로를 향한 의심을 이미지화한다. 울퉁불퉁하고 구불거리는 아카이브 테이블은 말과 뜻 사이에 놓인 무수히 많은 ‘뜻에 대한 뜻에 대한 뜻…’을 향한 신중한 발걸음을 향해 디자인되었다. 주춤대며 걸어가고 여러 번 멈추고 뒤로 돌아가고 중간에 이탈하며 아카이브를 응시하는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한 자신의 언어 구조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소통에서 오해와 오차의 발생은, 그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의 축적은 필수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소통의 불가능성, 이해의 불가능성을 지지하는 논리로 귀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때 ‘소통은 편지’라는 은유는 약속과 책임, 그리고 비밀, 내밀성이라는 개념들을 열어젖힌다. 전시장에 놓인 한영현의 편지들은 소통의 경로 안에 놓인 ‘~가 ~에게’라는 암묵적인 경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시저 왕자님께> 보내는 편지와 <인경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들 속에 또박또박 힘줘서 쓴 글자들은 맞춤법에 따르면 주술 관계가 맞지 않기도 하고, 문장이 끝나지 않기도 하고, 모음 없이 자음만 남아 있기도 하며, 곳곳이 지워져 있다. 하지만 편지 안에서 반복되는 “기쁨”, “사랑”, “선물”, “행운”, “행복”과 같은 단어들은 흔들리지 않고 정확하게 쓰여있다. 이 편지는 상대를 향한 애정과 안부를 묻는 마음으로 쓰였다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 말에서 뜻으로, 혹은 뜻에서 말로 움직이는 소통의 경로가 보통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전달 과정에서 의미에 굴곡이 만들어지고 형태가 바뀌고 경로에서 이탈하는 사건이 생기더라도 누군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면 지연과 이탈은 중요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어느 시점에 어느 장소로 무언가가 ‘도착 중이다’라는 믿음이 공유되고 있다는 믿음.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도착할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믿음. 도착 중일 어떤 것을 믿는다는 공통 분모에서 소통의 의미가 발생한다. 어떤 의미가 출발했고 이제 그것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우리가 존재한다면, 기다림과 기대, 약속과 책임이 유지되는 둘 이상의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편지는 도착 중이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도착 중인 편지, 오로민경의 <복잡한 몸을 위한 용기와 사랑>은 자기 몸에 대해 내밀한 고백을 담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 전시장에 남겨두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속삭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슬프고 웃기고 공감이 가며 의외의 순간에 용기를 준다. 스스로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그것은 여기가 안전하다는 믿음 안에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열렸다. 이 편지책을 읽으며 커다랗고 높은 장벽에 작은 낙서를 남기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장벽에 노래가 닿을 때까지 낙서를 남기는 사람들. 낙서에 담긴 비밀스러움이 장벽 바깥에 위치했던 구경꾼들을 언젠가 ‘여기’로 끌어당길 것이다.
* “우리에게 언어와 생각은 항상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 자신을 표현한다. 내면의 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언어는 흔히 일종의 발산처럼 느껴진다. 자아의 자발적인 전송 같은 것. 처음에 우리는 언어에 반드시 구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엄청나게 복잡하고 형식을 갖춘 구조가 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이 구조를 의식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올리버 색스, 『목소리를 보았네』, 2018, 알마, 114-115p.)
아르코 미술관 전시 <여기 닿은 노래> 크리틱 (월간미술 2024.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