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마음 속으로 응시해온 풍경 하나가 있다.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3,80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로힝야 난민캠프. 그곳에는 피부색이 남들보다 조금 더 검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아니 사실 어떤 특별한 이유 없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제 몇 주 후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행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간다. 언제 갈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해오던 곳이지만 막상 가게 되니 기대되는 감정보다는 걱정과 초조함이 앞선다.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풍경이 움직이고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생각보다 빨리 그곳에 가게 된 것에 대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당황스러워진 것이 아닐까 싶다. 멀고 위험해서 직접 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안전지대와도 같은 나의 집에서 스크린을 조금 더 응시해야 한다고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떤 사진 한 장과 어떤 손짓이 계속 마음에 남아 리서치를 해온 시간들. 그것은 너무 잔인한 이미지와 텍스트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이며 제자리를 맴돈 시간이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시간이었으며,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의심해온 시간이었다. 읽고 쓴다는 것만으로 내 몫을 다했다라고 단정 짓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지나치게 힘들어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주민등록증이 있고 전쟁을 경험한 적 없고 오늘 편안히 잠들 곳이 있고 생각을 충분히 글로 적어낼 수 있는 내가 왜 저 멀리 캠프에 수년째 살고 있는 여성들에 대해 쓰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다는 어떤 눈빛 앞에서 매번 더 진심으로 설명해야 했을까.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들을 삭혀두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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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과 거리두기를 하며 외출을 자제하던 시기에 window swap 이라는 웹사이트에 종종 들어가곤 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바깥 이미지에 대한 갈증이 커지던 때였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집 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공유했고 방문자들은 타인의 집에 들어간 듯한 감각을 즐겼다. 아름다운 정원이 보이는 영국 데번에 사는 마크와 케이티의 창문,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사이로 붉은 꽃 한 송이가 보이는 미국 플로리다에 사는 베일리의 창문, 차가 지나가는 도로 위로 비가 내리는 포르투갈에 사는 안나의 창문 등. ‘Open a new window somewhere in the world’라는 버튼을 누르면 다른 창문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랜덤이기 때문에 다음에 어떤 창문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오랜만에 다시 들어가 보니 유료 버전이 생겨 있었다. 그동안 방문자 수가 꽤 많았다는 뜻이다. 마스크를 끼지 않은 풍경이 다시 빠르게 찾아왔는데 많은 사람이 여전히 타인의 창문으로 바깥을 보길 원한다. 이전의 무료 버전과 달리 월 5달러를 내는 유료 버전은 공유되는 창문의 수가 무제한이고 광고가 뜨지 않으며, 원하는 조건으로 필터링을 할 수 있다. 방문자는 반려동물이 있는 창가를 보고 싶거나, 비가 오는 날씨를 원하거나, 눈이 오는 풍경을 원하거나, 밤하늘을 보고 싶을 때 필터링해서 원하는 종류의 창문만을 볼 수 있다. 필터의 조건은 하나같이 사람들이 액자에 걸어놓고 보고 싶은 장면들이었다. 유튜브의 플레이리스트처럼 대체로 모두가 좋아할 법한 풍경, 소유하고 싶은 풍경, 오래 바라보아도 불편하거나 마음이 쓰이지 않는 풍경, 소위 ‘힐링’이 되는 풍경,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풍경. 그것은 내 것이 아니기에 부럽기도 하지만 남의 것이기에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는, 아니 하지 않아도 되는 풍경들이었다. 이 사이트에 업로드된 창문들의 공통점은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사람이 없기에 어떤 사건도 행동도 일어날 일이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고요한 풍경을 자신의 집 안에서 영원처럼 누릴 수 있는 공간. 그곳은 돈을 내고 무언가를 오래 응시한다는 점에서 영화관과 유사해 보이지만, 응시가 사유가 되고 행위가 되고 세계에 대한 반응이 되는 경로가 단절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영화로부터의 도피처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스크린으로 풍경을 응시하는 이들의 창문은 어떤 현실의 장면으로부터 닫혀 있을지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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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으로 이사 온 지도 반년이 지났다. 날씨 지도에 내가 사는 곳의 온도가 가장 낮게 찍혀있는 걸 매번 신기해하던 계절도 끝나간다. 매일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고 거실로 들어오는 빛이 점점 더 따뜻해진다. 요즈음은 낮시간 대부분을 베란다에 캠핑 의자를 펴고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가끔 고개를 들어 베란다 창문 너머로 보는 풍경은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정적인 일상이지만 그 사이에서 움직임을 관찰하는 게 작은 재미이다. 11시 방향 커다란 나무 아래에는 벤치가 여러 개 놓인 쉼터가 있고 게이트볼 연습장처럼 보이는 작은 공간이 있다. 원형의 인조 잔디가 깔린 그곳에는 매일 노년의 남성들이 긴박하지도 스릴 있지도 않은 느린 경기를 이어간다. 며칠 전부터는 창문과 벤치 사이의 큰 나무에 꽃이 가득 피면서 시야를 가려 사람들의 다리와 공만 겨우 보이고 있다. 큰 나무에 시선을 잘 고정하면,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틈새로 빨간 공이 구르다가 멈추고, 공을 따라서 두 발이 천천히 이동하다가 멈추고, 또 다른 두 발이 뒷걸음질 치다가 되돌아오고, 공 앞에 서서 침착하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는 몸짓들이 보인다. 공과 몸이 서로를 쫓는 저 풍경을 매일 챙겨본다. 작은 공은 도망치고 느린 몸들이 그 뒤를 천천히 쫓는 반복적인 풍경을. 나이 든 몸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치는 빨간 공의 생기를 관찰하는 일에 묘한 애정이 생기고 있다. 움직인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사이에 어떠한 유사성도 없는 영화를 보는 듯하다.
11시 방향만큼 자주 바라보는 2시 방향 풍경에는 하늘과 산과 강이 있다. 하늘과 산과 강 사이에는 선명하게 솟은 모텔과 호텔 간판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고 기차역에서는 매 시간 열차가 지나간다. 그리고 저 멀리 알록달록한 장난감같이 생긴 성과 탑이 마치 합성처럼 있다. 저 풍경은 움직이지 않는다. 산 아래로 흐르는 강 위에 중도라는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지은 레고랜드이다. 레고랜드가 지어진 땅 그러니까 강의 유속이 느려지면서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하중도의 일종인 저곳은 꽤 규모가 큰 선사시대 유적지이다. 레고랜드 건설 과정 중 수천 년 전에 누군가 살던 흔적이 흙 속에서 대규모로 발견된 것이다.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지만 곧 재개되었다. 그렇게 오래된 유적이면 아마 그냥 돌과 구별하기 쉽지 않을 테니 건설과정에서 ‘그냥 돌’처럼 생긴 수많은 유적은 그냥 부서지고 다시 흙 속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냥 돌’과 ‘그냥 돌처럼 생긴 유물’을 비교하려다가 눈을 감는 어떤 이의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기억이란 게 남아있는 6살쯤부터의 시간을 들추면 중도 유원지를 배경으로 한 이미지들이 몇 장 있다. 고인돌 주변에서 보물찾기하던 친구의 뒷모습 같은 것. 그때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곳에서 찍은 유년의 사진들이 하나같이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인 걸 보면 장소에 대한 애틋함이 뒤늦게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보다 훨씬 작은 나는 그때 그곳을 걸으면서 발아래에 묻힌 오래된 진동을 느꼈을까. 누군가의 흔적 위로 또 다른 누군가 이어서 기억을 쌓아가던 장소가 보편적인 동심을 연출하는 테마파크로 변했다는 사실이 어딘가 씁쓸함을 남기는데 그 감정이 동반하는 상실감에 대해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적절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7시 방향 창문 쪽에서는 가까운 시야 안에 도청이 보인다. 도청 정문 앞에는 유적지 훼손 반대 시위 텐트가 매일 펼쳐져 있다.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스피커로 크게 민중가요를 틀어놓은 채로 그곳을 점거한 중년 남성들의 목소리에 관심이 생긴 적은 없다. 나는 유적지 위에 생긴 테마파크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거라는 꿈을 꾸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세계적인 유적지에 자긍심을 갖지 않고 테마파크를 세웠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저 땅 아래에 묻힌 어떤 돌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를 뿐이다. ‘그냥 돌’처럼 생긴 사물들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어떤 장소가 쓸모와 용도에 따라 뒤바뀌는 것을 지켜보는 감정을 과장된 슬픔이나 분노, 애국심과 같은 거대한 감정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말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나의 집도 아니고 나의 땅도 아니고 나의 일터도 아니지만 기억 속에 깊숙이 자리한 장소에 대해 할 수 있는 말, 나와 상관없지만 나의 기억과는 상관있는 곳에 대해 할 말. 유적지라서 보호되어야 하거나, 지역이 발전할 기회라서 개발해야 하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물러서야 하거나 하는 이야기들 말고, 어떤 목적 속에서만 파헤쳐지거나 덮어지는 땅에 대한 이야기 말고, 아주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계속 그 자리에 남게 된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곳의 용도와 쓸모를 대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말고, 그곳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땅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립다. 그 장소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있기를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거기 그대로 있게 된 장소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 그런 이야기는 너무 오래되어서 마치 신화와 같이 아득하고 흐릿할 것이다. 다시 창문 앞에 서서 저 멀리 한때 누군가의 집이었던, 유적지였던, 유원지였던, 소풍 장소였던 테마파크에 쌓아 올린 거대한 장난감의 모양새를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아파트의 수많은 창문들 안에 이렇게 저곳을 응시하는 사람이 한 명쯤은 더 있지 않을까. 그리고 생각한다. 아마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있겠지. 외칠 수 있는 말이 없는 사람들, “다 그런 거지”라는 말 앞에서 멈춰 서는 사람들, 차마 어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저 오래 응시하는 사람들. 언제부턴가 투쟁과 외면 그 사이에서 말없이 머무르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접지 못하고 있다. 집이라는 단어 주변에 뿌리내리는 말들. 확신에 찬 커다란 목소리 뒤에서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들과 그냥 지나칠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어 멀리서 지켜보는 눈동자들, 계속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발걸음들. 아마 창문 뒤의 영화.

<에코에코>(2023) 세번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