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고동 소리가 되고 싶어


0.

창문을 열자마자 풀냄새가 진하게 방안으로 밀려 들어오던 날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 주변의 가로수와 화단의 무성한 잡초들을 깎아내는 소리가 그날 종일 귓가에 울렸다. 다음 날 아침 산책하는 길에서 죽은 쥐를 봤고, 밤늦도록 창밖에서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칼날이 향했을 낮은 곳에서 누군가 마주했을 풍경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1.

도청과 아파트 단지 그리고 저 멀리 삼악산과 소양강으로 둘러싸인 근교 지역. 아주 외진 곳도 아주 번화한 곳도 아닌 이곳에서, 적당히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아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층에 두 해 전부터 살고 있다. 집 앞에는 적당히 붐비는 마트와 차가 밀리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도로가 있다. 창문을 활짝 열어두면 차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가끔씩,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개와 고양이 소리도 적당히,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도 시끄럽지 않게 들리는, 그러니까 어떤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 버리는 그런 동네이다. 층간 소음도 없어서 윗집 아랫집 옆집에는 도대체 어떤 성격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인지, 그들에게 내가 만드는 생활 소음이 시끄럽게 들리지는 않을지 가끔 궁금해지곤 한다. 대도시와는 사뭇 다른 고요함 속에 몸을 두게 되면서 지금 이곳에 없는 것을 상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전이라면 한 번 볼 것을 두 번 세 번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이제서야 감각을 필요한 곳에 의지를 들여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보낸 시간 동안 쌓인 피로와 회의감에 눌려 잘 작동하지 않는 망가진 시청각 매체와 같은 몸을 다시 돌보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쏴아아아아-

며칠 전부터는 방에서 폭포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요즘은 온 신경이 향해 있다. 폭포 소리가 나는 쪽 창문에선 맞은편 아파트 단지의 입구를 볼 수 있다. 창문 너머로 ‘이 편한 세상’이라는 문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는 커다란 인공 폭포가 하나 있다. 평소에는 그저 큰 바위벽일 뿐이지만 날이 더워지면서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평년보다 더 빨리 무더위가 찾아온 올해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이 될 거라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점심 먹을 즈음이면 폭포가 켜지고 저녁 먹을 즈음에는 꺼지기를 반복하는 일상에서 오후 시간에는 다른 소리를 잘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폭포 소리를 크게 듣는다. 일상의 빈틈으로 쉴 새 없이 밀고 들어오는 물소리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다른 생활 소음과 인공의 소리를 가볍게 누른다. 안 그래도 적당히 귓가를 스치던 새소리, 대화 소리, 자동차 소리, 바람 소리가 하나의 소리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럴 때면 이곳에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이렇게나 존재감이 큰데도 아무도 민원을 넣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아마 다들 아파트 단지에서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자연의 소리를 본능적으로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자연이 처한 상황에는, 그리고 자연이 고통받고 있다는 목소리에는 무관심한 인간의 모순적인 면이 저 인공 폭포가 삼키는 소리 풍경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보기에 아름답고 듣기에 좋지만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어떤 것.

저기에 놓인 실제 바위, 저기 흐르는 진짜 물, 그 틈을 비집고 자라나고야 마는 민들레꽃과 바닥에 쌓인 모래. 그리고 이 모든 개별 자연을 재조합하여 인공 폭포라는 유사 자연으로 작동시키는 파이프 장치는 생태주의와 자본주의의 기묘한 합성품이다. 인공 폭포의 소리는 자연의 환청과도 같다. 자연 폭포의 소리와 거의 다르지 않은 소리를 내는 저 인공물은 언제나 아름다운 자연이 늘 같은 모습으로 제자리에 있을 거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증강현실 광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케이블카 건설로 설악산이 파괴되는 것에 무관심하고, 해군기지 건설로 제주 강정 바다의 산호초가 사라지는 것에 무관심하고, 비자림로가 도로 건설로 파괴되는 것에 무관심한 당신의 일상이 변하지 않더라도 폭포 소리 같은 자연의 백색소음은 매일 시원하게 당신의 귀를 파고들 것이라고 이 편한 세상이 속삭인다. 쏴아아-. 창문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폭포의 물줄기와 바위, 나무, 풀들의 흔들림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오늘 배송받은 <저주체>라는 제목의 책을 펼쳤다. 책에서 생태이론가 티머시 모턴과 인류학자 도미닉 보이어는 자본과 이성, 기술이 지배하고 파괴하며 끝없이 상승하는 힘이 만들어낸 초객체적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낮추며 관계들을 향해 이동하는 저주체의 정의를 찾아간다.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고 서로를 보살피고 아파하며, 전체보다 부분을 생각하며 아래에서 실패할 위험이 높은 혁명을 모색하는 존재. 저 인공 폭포에서 해체되어야 할 바위와 풀, 물과 흙의 자리에 대해 생각하며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린 할 수 있어, 다른 것을 해낼 수 있어. 신자유주의가 자신의 구성요소보다 작은 것임을 우리가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물리적으로 신자유주의는 거대할 수 있어. 무장한 경찰들을 통해 지구 전체를 덮는 거지.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북극곰 한 마리보다 작아 …….”+

2.

늘 거리에서 북극곰 한 명, 비자림의 삼나무 한 명, 가덕도의 직박구리 한 명의 존재론적 의미를 소리내어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나타남으로써 그곳에 나타날 수 없는 존재들과 함께한다. 그리고 존재론적으로는 훨씬 작지만, 물리적으로는 훨씬 거대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외친다. 여기에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더해지면 다른 존재의 목숨과 거처를 빼앗기 위한 목적이나 의도에 땅, 집, 돈, 물건의 소란스러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념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 혐오와 같은 부정성의 감정이 남는다고 소리친다. 그것은 다른 존재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버리는 상황들을 만들어내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제노사이드, 멸종과 같은 사건으로 치닫는 현실을 폭로한다. 소리 내지 못한 죽음들은 애도 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알린다. 언젠가 시인 메리 올리버는 말했다. 세계는 하나일 뿐이라고. 세계는 정말 하나일 뿐이다. 무언가로부터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끝없이 걸어가더라도 언젠가는 그 무언가의 뒤를 밟게 될 것이다. 제주 동굴 천장에 맺힌 물방울들을 올려다보던 축축한 기억과 바짝 마른 난민 캠프의 흙바닥을 걸어가던 건조한 기억 속에서 망각했던 하루들을 이어보면 늘 세계는 하나일 뿐이었다. 제주 전역의 어두운 동굴에서 들리는 4.3의 침묵과 지하 대피소에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침묵, 난민 캠프의 비좁은 천막 안에서 다시 살아가야 하는 로힝야 사람들의 침묵, 제주항에 도착하지 못한 뱃고동 소리의 침묵. 그 침묵의 연쇄 속에서 메아리치는 속삭임.

“뱃고동 소리가 되고 싶어”

그/녀가 말한다. 뱃고동 소리가 되고 싶다고. 뱃고동 소리를 닮고 싶은 마음, 뱃고동 소리를 지니고 싶은 마음, 뱃고동 소리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뱃고동 소리와 나라는 지극히 먼 두 존재 사이에 자리 잡고 싶은 마음, 심연과도 같은 간극을 건너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은 불완전함 앞에서 뒤돌아서지 않는 마음과도 같다. 내가 들었다고 생각한 존재로서의 소리는 여전히 그곳에 있는지, 소리라는 그 존재는 듣고 있는 나의 존재를 인지하는지, 다시 그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여전히 그것이 같은 소리라고 알아챌 수 있는지, 불확실함 속에서 진동하는 질문들을 남겨둔 채 소리가 있던 장소에서 떠나지 않는 이들이 아주 긴 행렬을 이루며 흘러간다. 어쩌면 “뱃고동 소리가 되고 싶어”라는 목소리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 앞에 남겨진 심연 속에 머물러 보겠다는 가장 큰 결심의 흔적일지 모른다. 그건 소리가 나에게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이자, 소리가 나는 방향 반대로 걷게 되겠지만 더 긴 그림자를 이끌고 되돌아오겠다는 외침과도 같다. 저 멀리서 희미한 약속과 외침과 선언이 합창한다.






3.

전시기간 동안 나의 장소에서 일상을 살아가며, 도처에 놓인 가깝고도 먼 현장을 감각하고 파편과도 같은 일상의 잔상들을 매일 모았다. 매일 조금씩 조금씩 써내려간 글에는 서울을 걸으며, 춘천을 걸으며, 제주를 걸으며, 인천을 걸으며 진동하던 마음이 담겨있다. 글을 쓰는 동안 산지천에서 제주항까지 언뮤트 팀이 걷는 모습이 담긴 <기억하며 걷기>라는 영상에 마음을 많이 의존했다. 멀리 가지 못하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현장을 찾는 기민한 이들에게 이 글을 한 통의 편지처럼 발신해본다. 제자리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먼 곳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밝은 귀를 가진 이들에게 이 짧은 글이 가닿기를. 될 수 없는 것이 되기 위해 앞으로 끝없이 걸어야 할 긴 행진의 신호가 지금도 어둠 속에서 깜빡이고 있는 것 같다. 깊은 밤마다 그 강에서부터 그 바다까지 곳곳에서 작은 빛들이 되비춘다.


+ 티머시 모턴, 도미닉 보이어, 『저주체』, 안호성 역, 갈무리, 2024, 171p.

≪음소거된 물의 소리 : 진동의 걸음≫
2024년 6월1일 - 7월 21일 
산지천 갤러리
전시: 다이애나밴드(신원정, 이두호), 오로민경, 김그레이스
워크샵: 오로민경, 전솔비
디자인: 즈즈스 스튜디오 
공간 설치: 우주우공방 
글: 전솔비 
코디네이터: 조은 
전시기록: 까마귀픽쳐스
기획: 김그레이스
주최·주관: Unmute Water 프로젝트
협력: 사단법인 아디
후원: 제주문화예술재단, 제주특별자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