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다, 기억, 미디어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말이지. …
어쨌든 바다 속을 떠다니고 있는 감각이야.”[1]
카지오 신지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츠루타 겐지의 만화 『추억의 에마논』은 거대한 기억을 가진 에마논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다. 에마논은 NONAME을 거꾸로 발음한 것으로, 이름이 없는 자라는 의미이다. 아마 여러 존재가 쌓아온 30억 년의 기억을 가졌기에 자신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 것으로 추측된다. 에마논의 조상들은 바로 앞의 선대가 체험한 기억까지 고스란히 후대에 전승하는 식으로 살아왔다. 기억을 전승한 자는 빈 껍데기처럼 망각의 상태에 접어든다. 에마논의 조상은 인간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지구에 생명체가 처음 생겼던 순간에서부터 현재까지의 기억이 모두 에마논에게 남아 있다. 최초의 생명 형태인 단세포생물이 생기고 그것이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만들고 바다에 미생물들이 우글거리다가 점점 더 큰 생물들이 탄생하고 이들 중 일부가 육지로 이동해서 진화해 온 기억이 10대의 모습을 한 에마논의 기억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기억의 총집합에서 나와 타자,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사라진다. 지구의 모든 시간을 전부 기억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어떤 감정으로 그 방대한 기억의 무게를 감당할까? 거대한 파도를 응시하며 담배를 피우는 에마논의 표정은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는다. 낯선 이와 하루를 보내며 망각 없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의 아득함을 잠시 공유할 뿐. 이때 기억하는 일에 관한 가볍고 무거운 대화가 오가는 장소는 다름 아닌 바다 한복판의 커다란 배 위이다. 기억하는 자와 그것을 듣는 자의 일시적인 관계는 방대한 기억의 바다를 지나가는 인공물 위에서 위태롭게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
바다는 오래전부터 지구의 모든 생명이 탄생한 창조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인공물로 구축된 문명이 무력해지는 파괴의 장소로 인식 되어왔다. 그동안 미술 작업들 안에서 바다는 보존해야 할 생태적 장소이자, 자연이 창조한 예술 작품으로서, 자본주의의 거대한 시장이자, 핵발전소와 신공항 반대를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들의 현장으로서, 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도망치는 위태로운 경로이자, 이주민들과 노동자들의 일의 터전으로서, 디아스포라의 역사이자, 신비로운 신화 혹은 아득한 공포의 세계로 존재해 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바다는 수많은 기억의 시작이자 무덤이라는 점에서 인간을 매료시킨다. 바다는 기억의 아카이브임이 틀림없지만, 인간은 결코 바다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알 수 없다.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저장소로서의 바다가 인류에게 남기는 의미를 이해하고자 끊임없이 탐구해 왔다. 때로 그것은 특정 주제나 소재로서 바다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바다를 하나의 미디어로서 사유하는 태도를 요청하기도 한다. 이때의 미디어란 의미 전달의 수단이라는 좁은 의미를 넘어, 인간이 말하고 행동하는 하나의 조건을 뜻한다. 미디어 철학자 존 더럼 피터스(John Durham Peters)는 미디어 이론을 “세상과 상호 작용하는 정신의 감각 비율이 달라지는 것”에 관한 탐구라고 하며,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대부분의 것들을 포기하게 만드는 환경”으로서 바다를 바라보자고 제안했다.[2] 그것은 바다가 숨쉬기와 관련된 인간의 기본 조건이 변화하는 환경이자 인간의 문명이 무력해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빛과 소리 환경이 육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물의 세계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일정한 깊이에 도달하면 사실상 빛이 사라져 버리는 바다는 주로 ‘보는 것’을 통해 타자를 감각해 온 인간의 문화예술사가 적용될 수 없는 공간으로 바뀐다. 반면 소리는 물속에서 공기 중에서와는 다르게 거의 다섯 배나 빠르게 나아가며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할 수 있다. 시각이 닫히고 청각이 열리는 장소로서 바다는 소리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인간의 ‘듣는 감각’이 지닌 한계와 가능성을 실험하는 장소가 되어왔다.
이때 바다에서 육지로 이동하며 진화한 포유류인 인간과, 바다에서 육지로 그리고 다시 바다로 이동하여 진화한 고래는 유의미한 비교 대상이 된다. 해양 환경에서 인간만큼이나 고도의 지능을 갖춘 고래와 인간 사이에서 의사소통 방식의 결정적 차이는 말하기와 듣기의 흔적을 기록하는 물질의 유무에 있다. 인간은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기록 매체가 필요하지만, 고래와 같은 해양 생물은 수백만 년간 물을 가지고 실험을 거듭하며 기록 매체 없는 청취 저장 능력과 전달 능력을 개발해 왔다. “송신자가 많은 멀고 깊은 바다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서는 그 어떤 단일한 ‘지금’도 순서를 돌아가며 대화하는 지렛대로 작용할 수 없다”.[3]‘지금’이라는 순간이 확장된 세계인 바다에서는 듣는 존재가 흩어진 메시지를 역으로 재구성하며 차이를 스스로 이해하는 몸이 된다. 바다에 적응한 존재의 몸은 ‘물’이라는 매체를 통해 아주 오래된 소리, 아주 멀리서 온 소리와 소통한다. 육지 환경에서 익숙한 미디어의 시간 기록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물은 기억을 보존하고 전달한다. 이처럼 바다라는 거대한 미디어는 여전히 과거의 소리가 전달 중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그리고 물을 듣고 물속에서 듣는다는 행위를 통해 이미 망각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인간에게 아직 ‘상상’의 영역에 있는 것이 이미 해양 생물에겐 ‘현실’이라는 사실은 ‘바다’라는 세계를 감각적인 것을 재배치하는 가능성의 장소로 재고하게 한다. 그렇다면 바다를 통해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다를 탐구하는 행위는 ‘다른 방식으로 듣기’,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기’라는 질문을 인간에게 던지고 있다. 바다를 미디어로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과는 다른 존재의 청취 기관이자 아카이브로서의 물을 기술적으로, 예술적으로, 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듣는 인간’의 의미를 존재론적으로 재고찰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맥락 위에서 바다라는 미디어의 조건을 염두에 두며 듣기 행위가 지닌 수행성으로부터 기억의 문제를 사유하는 동시대 미술 작업들을 짚어본다.
2. 바다로부터, 음소거된 세계를 듣기
지금이라는 순간이 확장된 바다의 기억을 탐색하는 것은 물의 다원적 시간성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연결된다. 육지 환경에서 경험하는 시간성과 해양 환경에서 경험하는 시간성이 다르다면, 그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선형으로 이어지기보다 원형 혹은 나선형으로 순환하기 때문이다. 물의 다원적 시간성 속에서 오래된 물과 새로운 물은 한 몸을 이룬다. 바다라는 물의 세계에 익숙한 몸들은 다른 시간대의 존재가 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소리를 통해 다른 시간대의 존재와 소통할 수 있다. 인간이 바다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이유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무한한 커뮤니케이션을 향한 열망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현재라는 시공간적 한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이 물의 다원적 시간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김그레이스, 다이애나 밴드(신원정, 이두호), 오로민경으로 구성된 언뮤트 워터(Unmute Water) 프로젝트(2023-)는 인간의 청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물의 소리를 감각하기 위한 예술적 방식을 제안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는 관계적 청취 방식을 탐구한다. 이 프로젝트는 제주도라는 현장을 기반으로 지하수를 리서치하며 이루어졌다. 제주도의 지하수는 빗물이 땅으로 흡수되어 만들어진 지하 담수와 바닷물이 화산암반층에 의해 자연적으로 여과되면서 지하에 스며든 용암 해수로 이루어져 있다. 30만 년 이상 제주의 땅 아래에 존재해 온 물의 소리는 오래된 바다에 존재하는 생명의 기억, 역사적으로 4·3이라는 아픔을 품고 있으며, 관광화된 환경 속에서 자원으로 소비되어 온 섬이 지닌 파괴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물의 기억이라는 하나의 상징이자 실재로서 제주의 지하수는 언뮤트 워터 프로젝트에서 현재의 우리에게 도달해야 할 과거의 아카이브이자, 비가시화된 영역에도 역사가 존재한다는 믿음, 기억하는 행위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로 변환한다.
제주도의 지형은 육지를 이동하는 바다의 일부인 물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바다의 물이 화산 지형과 만나 땅으로 흡수되어 여과된 담수가 되고 다시 바닷가 주변에서 솟아 나오는 용천수가 되어 바다로 흘러가는 흐름이 지형적으로 가시화된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언뮤트 워터 프로젝트는 바다와 육지를 순환하며 기억을 흡수해 온 물의 소리를 듣기 위해 건천, 동굴, 숨골, 해안가 등의 지형을 리서치했다. 그리고 이 리서치는 땅 밑 물의 소리가 인간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불가능성을 처음부터 마주하며, 물의 소리가 매개체로 사용하는 인간의 몸 그리고 인간의 기억 체계를 고민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들은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지점의 물소리를 듣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장치를 사용하는데 이때 물의 소리 듣기는 귀의 한계를 기술적으로 확장하기보다는 몸에 이미 도달한 파동에 집중하며, 들었다는 자각 이전에 이미 소리와 만나는 몸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접근할 수 없는 물의 상태에 다가가기 위해 소리를 데이터나, 패턴, 리듬으로 번역하는 도구들이 사용되지만, 이들의 관심은 더 먼 곳의 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정확하게 듣는 것보다, 들리지 않는 곳을 향해 몸의 감각을 바꾸고 변형하는 연습에 있는 것이다. 소리는 늘 존재하고 있고 이미 우리에게 도달해 있으며, 그것을 알아채는 깊고 낮은 감각을 깨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태도가 이 프로젝트 전반에 깔려 있다.
언뮤트 워터 프로젝트의 여러 작업 중 다이애나 밴드의 <들리는 점>은 효돈천에서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반복하는 돌들을 두드렸던 기록을 기반으로 한 드로잉 작업이다. 이 작업은 관객들이 가져갈 수 있게 비치된 큼직한 종이 위에 다양한 모양의 곡선과 x 표시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각각의 드로잉마다 ‘내려오자마자 평평 표면에 고이는’, ‘완곡하며 자랑스럽게 내어주면서’, ‘끝까지 담아내며 흥얼거리는’과 같은 문장들이 적혀 있다. 물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는 물의 소리에 대한 묘사이자 청자의 주관적 감상이 개입된 악보와도 같다. 한라산에서부터 서귀포 바다까지 13km에 이르는 효돈천은 제주도 대부분의 하천처럼,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다. 제주도는 지표면에 물을 머금을 흙이 적고 화산석으로 되어 있어서 누수되기 좋은 환경이기에 빗물이 하천이 되어 흐르지 않고 지하로 스며들거나 바다로 곧바로 흘러가 버린다. 물속의 소리를 들으려는 시도는 이 작업에서 물을 흡수한 돌의 소리와 물이 증발된 돌의 소리를 비교하며 물이 남긴 흔적을 시각화해 보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다이애나 밴드는 돌에서 같은 자리의 소리를 짚어내려고 했지만 돌의 몸을 알 수 없었기에 매번 다른 자리를 두드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들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들리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영역을 마주하며 이들의 관심은 듣는 몸, 인간이라는 청취 미디어에 대한 탐구로 자연스럽게 방향을 돌린다.
다이애나 밴드가 사용하는 지오폰(Geophone), 단파 라디오, 하이드로폰, 라디오 송수신기, 스트리밍 장치 등의 기계들은 기록을 위한 몸 바깥의 도구라기보다 듣는다는 개념을 확장하며 기억의 모양을 바꾸는 몸의 연장으로서 몸에 맞게 변형되곤 한다. 이들은 물이 내는 소리의 정체에 초점을 맞추며 어떤 기원 혹은 근원을 쫓기보다는 자신이 ‘들린다고 감각하는 것’에 내재한 주관성, 즉 인간의 한계에서 개입되는 상상의 영역에 집중했다. 즉 물의 소리라는 닿을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조사를 기술적으로 다시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기보다는, 들리는 것을 언어화할 수 없음에 대해 사유하고 그럼에도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두며 해석을 유예한 상태를 유지해 보는 것이다. 그것은 ‘뱃고동 소리가 되고 싶다’라는 불가능한 선언으로 이어지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 앞에 남겨진 심연 속에 머물러 보겠다는 결심을 남기기도 한다. 인간이 결코 바다의 기억과 물의 시간성을 알 수 없다는 깨달음 속에서 발견한 심연은 무엇을 들려주는가. 이는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이 하이퍼객체를 이해하는 방식과도 맞닿아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 이외의 객체를 바라보는 어떤 기준점을 흔들고, 이미 인간의 몸에 들러붙어 있거나 흡수된 자연을 인식하는 감각이다. 소리는 이미 도착해있고 인간은 그것의 그림자만 볼 뿐이다. 심연과 그림자의 어두움은 깊은 바다의 소리 풍경을 불러낸다. 이러한 감각 아래에서 인간은 모든 것의 우위에 있을 필요가 없어지고, 다른 비인간 존재들이 내리누르는 세계의 끝에 존재하며, 이러한 존재론적 간격으로 인해 내면에서부터 절뚝거리게 된다고 티모시 모턴은 말한다.[4] 절뚝거리고 비틀거리며 어지럼증을 느끼는 감각, 그것은 물속에서 숨을 쉬고 눈을 뜨고 귀를 열고자 애쓰는 인간의 몸짓과도 닮아있다. 언뮤트 워터 프로젝트는 다름 아닌 육지 환경에서 그 몸짓을 연습하는 이들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러한 활동이 수신자의 관점에 집중되어 있다면, 바다 환경에 무언가를 보내는 발신자의 시도로는 라디오 앰니언(Radio Amnion) 프로젝트(2021-)가 있다. 사운드 아티스트 졸 톰스(Jol Thoms)가 주관하는 이 프로젝트는 매달 보름달이 뜰 때마다 3일간 태평양 카스카디아 분지의 2km 아래 심해에 예술가들의 사운드 작업을 전송한다. 인간의 지각을 훨씬 넘어선 이곳에 소리를 보내기 위해 모든 송신은 심해에 설치된 중성미자 망원경 실험의 보정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진다. 중성미자 망원경이 원래 우주를 탐사하는 데 사용되던 기계라는 사실은 우주로 인간의 메시지를 보낸 골든 레코드 프로젝트가 1977년에 발사된 보이저호에 실은 음반의 이름이 ‘지구의 소리’였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심해를 이해하는 방식은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과 종종 맞닿아있다. 중성미자는 질량이 거의 없는 미세한 입자로, 중성미자가 물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빛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바다 환경을 탐지하는 것이 중성미자 망원경이다. 이때 심해에서 센서가 잘 작동하는지 점검하도록 과학적 위치 측정 신호를 내보내는 음향 보정 시스템을 사용하는데 라디오 앰니온 프로젝트는 여기에 예술가의 사운드 작품을 싣는다. 과학적 장치의 정확성을 정비하는 기술이 비과학적이고 때로는 오류로 인식되곤 하는 예술의 발신지가 된다는 점, 달의 주기와 관련한 의례적 행위라는 점도 흥미롭지만 비인간 존재와 소통하려는 시도, 물속에 기억이 저장된다는 믿음은 언뮤트 워터 프로젝트와도 맞닿아있다. 하지만 언뮤트 워터 프로젝트는 멀리서 전해지는 소리를 우리가 언젠가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수신할 수 있는 몸이 되기 위해 들리는 것에 몸을 맞춰보는 태도를 탐색하는 것에 가깝다는 점에서 인간이라는 한계를 응시하며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침묵도 소리를 내고 있다는 믿음을 유지한다. 김그레이스는 기획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감각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몸에서 몸으로 전달되는 파동으로 소리는 이미 우리에게 도달해 있다. 침묵이란 누군가 파동을 물리적으로 약화시키거나 내가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들리지 않는, 의도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5]
이 프로젝트가 ‘침묵’에 대한 문제의식, 즉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듣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유에서 출발했음을 알려주는 문장이다. 디디 위베르만은 반딧불이 사라지는 것은 오직 관찰자가 그 뒤를 쫓기를 포기하는 한에서일 뿐이라고 말했다.[6] 빛을 쫓는 몸짓은 소리를 쫓는 몸짓으로 연결된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우리의 몸이 파동의 연쇄 안에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 속에서 수행된다. 이때 물의 다원적 시간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몸이 소리를 듣는 매개물이자 파동의 흔적인 기록 미디어 그 자체라는 점을 인지하고, 함께 듣는다는 행위가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넘어 물리적인 연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선언이 된다. 궁극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듣는 감각’을 확장하고 ‘듣는 몸’을 변형시키는 연습을 통해 인간은 어떻게 다른 존재와 연결될 수 있는가,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깨닫게 되는가, 연결되는 감각은 어떻게 기억으로 나아가고 연대로 나아가는가 라는 중층적인 질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소리 풍경: 확장되는 지금
‘지금’이라는 순간이 확장된 물의 세계에서는 듣는 존재가 소리를 통해 흩어진 시간을 재구성하기에 과거와 잠재성이 모두 현재로 의미화될 수 있다. 바다의 시간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이렇듯 과거의 반대이자 잠재의 반대라는 이중성을 지닌 현재의 의미를 전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으며 현재의 확장된 의미를 깨닫게 되는가. 2016년 4월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10,000개의 웹사이트 중 하나이기도 했던 마이노이즈(Mynoise)는 사용자의 목적에 맞게 맞춤형 사운드 스케이프(Soundscape)를 제공한다. 쾌적함을 기준으로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고 주변 환경의 소리조차 백색소음으로 편집된 도시적 삶에서, 듣기는 이미 선택의 영역 안에 놓여 있다. 마이노이즈는 정원, 숲, 비, 바람, 카페, 싱잉볼, 폭포, 천둥, 여름밤, 고양이 등 다양한 테마의 소리를 들려준다. 바다와 관련해서 필터링할 경우 심해, 아일랜드 해안, 조약돌 해변, 해안가에 정박한 배, 바다 위의 유조선 소리 등이 검색된다. 이 모든 소리는 집중력을 향상시키거나 수면을 돕거나 명상을 위한 목적으로 제공되는데 서로 다른 소리를 혼합할 수도 있고 자신에게 맞게 소리를 변형시킬 수도 있다. 심지어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사용자의 청력 검사 결과에 맞게 음역대를 조절하는 것도 가능하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취향으로 주변의 소리를 바꿀 수 있는 백색소음은 쾌적함, 평온함, 편안함, 기쁨, 즐거움과 같은 긍정적 정동을 만들어내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낯설고 우연적인 것으로부터 차단된 자기만의 방에서 잘 재현된 바다의 소리를 고르는 사용자에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소리 풍경은 점점 더 낯선 것이 되어갈 것이다.
이미 들리는 것을 삭제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들린다는 사실을 통해 소리 내는 존재가 ‘있다’라는 자각으로 나아가게 되는가. 김지연, 이강일의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2015-) 프로젝트는 바다를 거쳐 먼 거리를 이동하는 각기 다른 소리 안에 날씨가 만들어내는 차이가 늘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환기하며, 날씨가 기입된 소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행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향한 돌봄이 연결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웨더 리포트는 2015년 제주 거로 마을에 있는 문화공간 양에 주변의 소리를 웹을 통해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오디오 스트리머를 설치했다. 한국에서는 이곳에만 설치된 이 장치는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로쿠스 소너스(Locus Sonus) 웹사이트에 연결되어 언제 어디서든 제주 거로 마을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이 웹사이트에는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고 육지에 표시된 50여 개의 장소에는 마이크 아이콘이 붙어 있다. 세계 지도는 회색으로 색칠된 육지와 파랗게 색칠된 바다의 영역을 구분하여 표시한다. 이중 바다에 설치된 오디오 스트리머는 없지만, 육지와 바다 위로 그어진 파동의 모양은 육지에서 출발한 소리가 바다를 지나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드러낸다.
2025년 8월 28일 오후 2시 56분, 웹사이트에 접속하여 JEJU GEORO라고 표기된 마이크 아이콘을 클릭했다. 바람 소리와 비행기 소리, 차 소리, 새소리인지 벌레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짹짹 소리, 누군가의 발이 흙바닥을 밟는 마찰음, 나무로 된 문을 여닫는 듯 끼익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멀리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으면 이 소리가 인터넷망을 통해 순식간에 전달되는 데이터가 아니라, 섬에서부터 바다를 건너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수많은 매체를 거쳐 도달한 소포처럼 물성이 느껴진다. 휴대전화, 혹은 노트북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임에도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자꾸 창밖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듣는 소리는 인터넷망을 통해 전송되는 데이터의 연속이지만, 웨더 리포트는 라이브 스트리밍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여 소리가 존재했던 저곳의 장소성을 부각하고 이곳에 약간의 지연과 소음과 함께 다시 등장하는 소리에서 무엇이 새로이 나타나는지 질문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움직이는 바람과 구름,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각기 다른 바닷물이 변화시키는 온도와 습도 등이 변화시키는 소리이자, 그 속에서 환기되는 자연 그 자체이다. 이미 사라진 것들이 지연된 시간을 통해 기억으로 되살아난다는 것, 풍경은 흔적으로만 현재화된다는 것을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것들 안에는 마이노이즈 웹사이트가 생성하는 여과된 긍정적 정동뿐만 아니라, 낯설고 예측하지 못한 것들과 마주하며 생성되는 부정적 정동 또한 포함한다. 2025년 8월 문화공간 양에서 열린 전시 <누군가 듣고 있어(Some-bodies are listening, too)>는 2016년 제주 조천읍 와산리에서 송출했던 웨더 리포트의 기록을 다시 살펴보는 <웨더링 아카이브>(2025)를 포함하고 있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가 아카이브 하는 것이 기상학적 수치나 객관적 자료로 고정된 날씨가 아니라 “오히려 날씨에 주의를 기울일 때 예민해지는 주변에 대한 감각, 정서적 변화, 네트워크를 통한 매개적 접촉이 불러오는 혼란과 우울의 정조처럼 주관적이고 임시적인 경험들”이라고 말한다.[7]네트워크로부터 전송되는 소리에 묻은 미묘한 감정에 대한 고민은 2016년의 작업 노트에도 유사한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다.
“투명할 것 같은 네트워크 창문이지만, 이를 통해 전해지는 자연에는 어딘가 깨질듯한 우울함이 있다는, 매우 주관적인 견해를 이야기해야겠다. 이제는 그 우울함이 소리와 시간을 관찰하는 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네트워크에서 오는 것인지, 스트리머 너머에서 오는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워졌다.”[8]
날씨에 주의를 기울이며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느꼈던 혼란과 우울의 정동을 고백하는 이 부분을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접촉에서 오는 부정적 정동은 소리에 노출된 몸이 지니는 취약성을 드러내고, 듣는 행위의 수동성을 보여주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오는 미지의 존재들을 확인하게 한다. 들리는 소리는 어떤 상징이나 해석의 영역에서 벗어나 그저 ‘존재함’으로 그곳에 있으며, 움직이고 숨 쉬고 이동하는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청자는 한때 그곳에 있던 날씨의 흔적을 겪는다. 보지 않았기에 혹은 그곳에 있지 않았기에 소리로 감각하는 풍경은 왜곡과 오해의 가능성을 늘 내포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고, 존재하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알아챌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듣기라는 행위 속에는 ‘날씨’라는 유일무이한 흔적이 남아있고, 그 순간을 추측하고 귀 기울이고 해석하고 조합하는 과정의 반복은 생동하는 자연과 연결되는 연습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때 경험하는 시간성은 나를 중심으로 주변 환경을 편집하고 조율하며 ‘확장하는’ 닫힌 현재를 넘어, 바깥에서 밀려 들어오며 수동적으로 열리고 ‘확장되는’ 현재에 더 가깝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내는 소리를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와 분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자, 바깥을 향한 귀 기울임은 늘 안쪽을 향한 살핌과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자각이기도 하다. 자신 이외의 존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이렇듯 자신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대한 알아차림과 늘 맞닿아있다. 웨더 리포트는 듣는다는 행위에 늘 타자와의 연결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점을 되뇌면서도, 듣고 기억하기의 무거움이 결국은 자신을 돌보는 동력이자 리듬이 된다는 성찰을 보여준다. 하루하루의 변화를 관찰하고 예민하게 감각하며, 매일 달라진 물과 공기의 흔적을 바라보는 웨더 리포트 작업은 세계를 기억하는 일이 자신을 기억하는 일이라는 역설적인 깨달음으로, 나와 세계가 연결된 듣기의 방식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다.
4. 물속에서 다시 쓰기
“고정된 자리에서 무언가를 배제하고 판단하는 귀가 아닌, 끊임없이 청해 듣고자 진동하는 귀를 상상합니다. 그 귀는 자신의 취약성을 압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불안정한 떨림 속에서 찰나의 공명이 발생하는 순간이 더없이 귀합니다. 타자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자는 떨림의 증언자가 됩니다. 듣는 자는 곧 함께 말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제 대화를 시작합니다.”[9]
지금이 확장되는 시간성, 내면을 향한 듣기, 나를 확장하는 듣기의 감각은 오늘날 바다가 지닌 공적 기억과 사적 기억의 조우를 통해 자기 서사적 글쓰기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유은의 작업 <애도하는 귀>(2025)는 개인의 사적 기억과 사회적 참사의 연관성을 반복적으로 마주하며 고통으로 남은 기억들을 듣고 다시 말하는 작업이다. 유은은 세월호 참사의 장소들에서 뱃고동 소리와 파도 소리, 비가 내리는 소리와 바닷새 소리, 휘파람 소리와 바람 소리와 같은 필드레코딩 소리와 퓨어데이터를 활용해 믹스한 소리를 전시장에 울려 퍼지게 했다. 이 소리는 혼합되고 재구성된 것이지만 특정 기억의 날씨를 이미지화하며, 개인의 기억과 사회적 기억,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흔들며 청자를 초대한다. 듣기를 통해 애도하고 기억하는 행위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고통스럽지만, 듣기의 공동체는 그 고통을 함께 통과하며 연루됨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언러닝 스페이스에서 주최한 전시 <우징: 섬 안의 섬>(2023)과 <아구아 비바 Agua Viva>(2024-) 프로젝트는 인간이 물과 함께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하이드로 페미니즘, 혹은 에코 페미니즘의 태도를 탐구하였다. 여기서 ‘아구아 비바’는 해파리, 혹은 살아 있는 물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참여 작가들은 형태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경계와 구조를 넘어선 것으로 ‘물’을 바라보며 유동성, 투과성, 창조성과 같은 물의 속성을 여성적 글쓰기에 반영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이는 바다로부터 시적이며 정치적인 목소리를 찾아, 물속에서 다시 쓴 이야기들로 바다를 향해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적 글쓰기를 주장했던 프랑스 철학자 엘렌 식수(Helene Cixous)는 언어라는 것이 온전히 번역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언어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기표를 고정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형 가능한 인간의 몸과 나란히 놓았다. 이 지점에서 성차나 성별, 성적 정체성이라는 현실의 문제와 언어 문법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단순히 은유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맞닿는다. 그렇게 언어의 몸을 유희하며 여성적 글쓰기는 기표가 갖고 있는 수많은 의미 중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심원한 곳, ‘알려지지 않은 것’, ‘저 멀리 있는 진실’을 향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과 감각에 기반한 글쓰기를 수행한다.[10]이러한 시도는 알렉시스 폴린 검스(Alexis Pauline Gumbs)가 해양 포유류의 바닷속 삶으로부터 흑인 페미니즘의 실천을 확장시킨 것과도 닿아있다. 그는 밤낮으로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소리를 탐지하고 서로의 위치를 수시로 확인하고 묻는 인더스강돌고래의 수용형 언어를 언급하며 “우리가 ‘자아’에서 발견하기 두려워하는 걸 정확히 ‘서로’에게서 찾자는 초대”로서 “어둡게 듣기”를 강조한다.[11]이처럼 다른 방식으로 듣기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 다른 방식으로 쓰기로 인간을 이끈다. 바다는 다르게 기억하는 법을 성찰하게 하는 곳이자, 인간이 당연시 여겼던 대부분의 것들을 포기하게 만드는 곳으로서 동시대 미술 안에서, 그리고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우리’의 불/가능성을 재고하는 가장 깊고 멀리 나아가는 장소가 되고 있다.
[1] 츠루타 겐지 그림, 카지오 신지 원작, 정은서 역,『추억의 에마논』, 대원씨아이, 2015, 81.
[2] 존 더럼 피터스, 이희은 역, 『자연과 미디어』, 컬처룩, 2018, 101.
[3] 존 더럼 피터스, 이희은 역, 『자연과 미디어』, 컬처룩, 2018, 145.
[4] 티모시 모턴, 김지연 역,『하이퍼객체』, 현실문화, 2022, 406.
[5] 김그레이스, 전시<Unmute Water: 음소거된 물의 소리> 서문, 2023
[6] 디디 위베르만, 김홍기 역,『반딧불의 잔존 - 이미지의 정치학』, 도서출판 길, 2012, 47.
[7] 문화공간 양, 전시 <누군가 듣고 있어> 소개글, 2025
[8] 김지연, 전시 <반쯤 열린 방> 도록, 2016, 46.
[9] 유은,『애도하는 귀』, 히스테리안, 2025, 198.
[10] 엘렌 식수, 신해경 역,『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밤의책, 2022, 17.
[11] 알렉시스 폴린 검스, 김보영 역,『떠오르는 숨』, 접촉면, 2024, 102.
<문학/사상 : 바다정동>(2025년 12호), 산지니,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