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ga




이탈리아어 fuga의 어원은 라틴어로 쫓다의 의미인 fugare및 쫓기다의 의미인 fugere이다. 즉, 한 파트가 다른 파트에 이어서 멜로디를 모방하는 것이 쫓고 쫓기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름지어졌다. 푸가는 비유하자면 일종의 돌림노래와 같다.



2016년 여름, 아이치 트리엔날레를 보러 일본 나고야 지역에 가게 되었다. 그 후 그곳에서 찍어온 여러 사진들 중 유독 한 장의 사진이 계속 잔상이 남는다.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이 새와 다시 시선을 마주친다. 사진을 찍던 순간 정확히 새의 두 눈은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어떤 말을 건넬지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 새가 지금 나를 관찰하고있는 걸까.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니, 그것보다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Brazil의 작가 Laura LIMA는 2008년부터 작업해온 <Fuga>를 2016년 나고야에서 선보였다.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남아있는 4층짜리 건물에 작가는 일백여 마리의 새들을 풀어놓았다. 한 때 사람을 위해 건축된 이 건물은 작가에 의해 새의 시선에 맞도록 재제작되었다. 커다란 새장 속에 갇힌 새들.



Fuga는 영어로 run away나 flight로 해석된다. 도주, 도망, 하늘에서는 비행의 의미가 될 것이다. 사실 이 공간의 그물망은 느슨하게 짜여있어서 실제로는 새가 충분히 탈출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하늘이 그리운 새 한 마리가 시도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가더라도 새들은 이곳으로 다시 도망온다. 먹이가 있고, 안전하며, 아름다운 둥지가 있는 곳. 그렇게 새장의 문은 열려있는데 새들의 수는 줄지 않는다.



거대한 새장 속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한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린다. 내부가 좁아서 한 번에 10여명씩 제한된 수만 입장할 수 있다. 나올 수 있음을 전제로 한, 갇힌 공간으로의 자발적 입장. 미지의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 뭔가 신기한 광경을 관람할 것을 기대하고 계단을 올라간다.



새에겐 거대한 새장이 인간에겐 작다. 새의 시선에 맞춘 공간에 들어가는 건 불편한 일이다. 사람들은 이동할 때마다 자꾸만 이곳저곳이 부딪힌다. 새들은 영역을 침범한 방문객의 눈 높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눈 가까이까지 날아와 눈을 정면에서 쳐다보기도 한다. 구경, 관람하기 위해 들어온 곳에서 관찰당하는 사람들.  

새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는 새장 속에서 인간의 시점은 극적으로 변한다.  시선이 쫓고 쫓기는 좁은 공간이 만들어진다. 



재미있는 건 곳곳에 그림이 있다는 것이었다. 새들을 위한 풍경화나 산수화이다. 새들은 그림을 밟고 그 위를 걸어다니며 흩뿌려진 먹이를 먹기도 하고 그 위에 배설물을 남기기도 하며, 때때로 그림을 쪼아보기도 한다. 새들이 그림을 보는 방식이다.

산수화 속에는 사람도 동물도 보이지 않는다. 새들이 상상할 수 있는 새장 바깥의 막연한 세계가 창문처럼 새장 곳곳에 세워져있다.

그 속에서 나는 문득 홋카이도의 한 산에 위치한 동물원을 떠올렸다.



눈 속에 파묻혀서 하얗게 변한 동물들의 이미지가 선명해진다. 관찰자의 위치전환에서 온 지나간 기억의 복기.  



존버거는 1977년에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 라는 글로 <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시작했다.

동물은 몰이해라는 좁은 심연의 건너편에서 인간을 뚫어져라 본다. 이것이 인간이 동물을 놀라게 하는지의 이유이다. 하지만 동물 또한 - 비록 길들여진 것이라 할지라도 - 인간을 놀라게 있다. 인간 또한 유사한, 그러나 동일하지는 않은 몰이해의 심연 건너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점은 그가 어디를 보건 마찬가지이다.’



이 사진에서 눈에 띄는 건 캠코더를 들고 펭귄을 보며 웃고있는 남자의 표정이다.
펭귄의 움직임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영상을 찍고 있다. 하지만 펭귄은 남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동물들이 인지하게 되는 것으로서, 그것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들이 자연상태에서 보이게 되는 반응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그림으로 그려진 대평원만큼이나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시선은 늘 어딘가에 달라붙으며 그것이 반복되면 대상에겐 노동이 된다.



동물원에 오래 지내며 인간의 시선에 익숙해진 동물들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거부한다.

인간을 바라보지 않거나, 바라보더라도 그 시선은 공허하다.



그렇다면 프레임 바깥을 알지 못하는 동물들에게 나는 그저 가끔 움직이는 배경일 뿐일 것이다. 나라는 주체는 의식하지 않는 대상에 의해 실체가 없는 배경의 일부가 된다.

인간은 무수히 많은 시선을 보내지만 보낸 시선을 결코 되돌려받지 못한다. 부착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시선들. 그래서 누군가는 타자성에 대해 스며들지 못하는 것, 타일적인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부수되는 이념에서 동물은 언제나 관찰하는 대상이 된다. 동물들이 우리들을 관찰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의미를 상실해 왔다.’



동물원에도 새장이 있었다. 아주 견고한 새장이었다.
비행, 도주, 도망을 꿈꾸는 동물원의 새들의 눈은 늘 바깥을 향해 있다. 



거대한 새장 속에서 구경을 끝낸 사람들은 관찰당했다는 기분을 안고 잠시 생각에 잠기지만, 이내 가뿐한 마음으로 이곳을 나간다. 다 보았다고 말하면서 뒤돌아 계단을 내려간다. 미술관이나 동물원이나 영화관을 나올 때도 같은 말을 한다.

다 보았다.

우리는 정말 다 본 것일까.



푸가에서는 하나의 선율이 다음에 올 모방을 허용하며 계속해서 도망친다. 시선도 그렇게 어딘가에 붙지 않고, 혹은 붙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까. 관찰의 대상 주위를 부유하기만 하는 관찰, 혹은 관찰의 대상을 소모시키지 않는 관찰.

잠시 고민하는 동안, 아직 보지 못한 다음 사람이 계단을 올라온다.

*
판단과 의미화로서의 일방향적인 크리틱에서 벗어나 호출과 연결로서 다방향적인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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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와 글자 사이에 사진이 있을 때 일종의 리듬감, 다른 호흡이 생긴다. 사진 에세이를 만들고 다시 글자만을 쓰는 글쓰기로 돌아가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공백이 아닌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영화 장면처럼 보이는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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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과 의미화로서의 일방향적인 크리틱에서 벗어나 호출과 연결로서 다방향적인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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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와 글자 사이에 사진이 있을 때 일종의 리듬감, 다른 호흡이 생긴다. 사진 에세이를 만들고 다시 글자만을 쓰는 글쓰기로 돌아가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공백이 아닌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영화 장면처럼 보이는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