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마치 투명한 불처럼 떨고 있었다.”1
제주 벌라릿굴에 다녀온 후 축축하고 아늑한 그곳의 잔상이 뿌옇게 떠오를 때마다 다와다 요코의 소설 <목욕탕> 속 파란 문장이 말을 걸어왔다. 여자는 욕조에 누워 머리끝까지 몸을 물에 푹 담근 채 눈을 뜬다. 그리고 물속에서 마치 투명한 불처럼 떨고 있는 물이 보인다고 말한다. 여자의 각막은 물 너머 희미한 빛이 만든 이미지를 ‘불’과 비슷한 어떤 것으로 인지하고, 한 곳에 고인 채로 일렁이고 흔들리며 반응하는 투명한 움직임을 ‘떨림’으로 감각한다. 다음 문장에서 여자는 화장으로 장사를 지내는 것은 싫다고 하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진동하는 감정들을 물방울같이 흩어지는 이야기로 이어간다. 죽어가는 몸에 대한 냉소적인 해탈과 죽은 영혼들을 감지하는 묘한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여자의 말에 밑줄을 그으며 파아란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문장을 읽었다. 문득 ‘몸과 물의 떨림’은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하나의 완벽한 사운드 이미지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물이 떨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몸도 떨고 있다. 물속에서 떨고 있는 몸을 보는 것은 물이 떨고 있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여자는 소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투명한 불처럼 떨리는 물’에서 연상되는 어떤 진동은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방식으로 문장 너머에 전달되고 있었다. 수면 아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몸의 곡선과 반짝이며 퍼지는 잔물결, 기포가 접촉하는 경계 지대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떨림, 물과 몸을 휘감으며 이리저리 떠다니는 조각난 글자들의 합창이 몸의 바깥이 아니라 깊은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아주 오래된 소리였다. 멀리서부터 나의 귀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소리를 기다릴 때면, 언제나 이미 몸을 몇 바퀴 휘감고 다시 나가는 소리를 만나곤 했다. 그곳에는 소리는 없고 항상 소리의 그림자만 있었다.
깊고 어두운 물소리를 회상하니 눈썹에 무겁게 맺히던 물방울의 차가운 감촉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숨을 쉴 수 없는 깊은 물 속은 아니었지만, 벌라릿굴의 깊고 어두운 구멍에서는 물이 가득 찬 무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각막에 동굴의 습기가 스며들었고, 호흡하는 매 순간 입 속에 동굴의 물기가 맺히는 게 느껴졌다. 조명을 켜면 공중에 총총 흘러가는 작은 물방울들의 길이 보였고, 숨을 쉴 때마다 나로 인해 미세한 물길이 사방으로 갈라지는 게 보였다. 몸속에는 가열된 물이 이곳저곳에서 밀려 나오는 중이었다. 숨을 쉬고 침을 삼키고 말하고 땀이 흐를 때마다 내 몸에 있던 물의 일부와 동굴이 갖고 있던 물의 일부를 교환했다. 동시에 몸이 지닌 물의 기억과 동굴이 지닌 몸의 기억도 섞여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 오래전에도 이와 같은 기억 교환의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찰나, 동굴 천장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돌을 타고 흘러내려 덩굴줄기를 지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찬물은 얼굴을 타고 미끄러져 볼에 난 솜털 사이에 잠시 고인 뒤 점차 작아져서 피부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물은 오래된 리듬과 방향성을 유지한 채로 무수히 많은 구멍을 지닌 나의 몸을 익숙한 매체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물은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아주 오래전 이름 모를 이들과 이름 없는 이들도 이곳을 지나갔을 것이다. 듣는 이 없이도 소리를 내며 물 밖에서 물 속으로. 물이 귓바퀴와 뺨을 혀와 식도를 폐와 주름을 맴돌고 통과하고 고이고 부딪히고 감싸는 동안, 몸 안에서는 파도가 치고 비가 내리고 이슬이 맺히고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동굴 끝에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입구를 오래 바라봐서인지, 머릿속에 윙윙대는 물소리를 계속 들어서인지 멀리서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천천히 동굴 바깥으로 걸어 나오니 풀밭에는 그사이 비구름의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아 있었다. 계절이 빠르게 바뀌는 중이었다.
다시 동굴로 들어가던 날, 나는 뒤섞인 네 명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어둠 속에서 마침 흩어진 영화가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모닥불처럼 모인 사물들 사이로 작은 나무 조각을 잡자, 구석에서 영사기에 필름 감기는 소리가 들리고 작은 불빛이 투명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조용하게 기억되는, 별의 의지’.2 동굴의 기억이 되감기며 망막에 미세한 불빛이 비쳤다. 이곳저곳에서 눈을 떴다 감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밝았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모스부호 같은 불빛의 리듬이 무언가 이곳으로 오고 있음을 암시했다. 어둠 속에서 밀려오던 심연의 공포와 알 수 없는 환대의 편안함 사이에서 커졌다가 작아졌던 심장 박동이 나무를 따라 흘러나왔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동굴의 소리 기억이 몸과 몸을 지나 이곳에 도달한다. 극장 안에 서늘한 동굴의 바람이 불었다. 기억 속에서 길어 올려진 소리와 기억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소리가 부딪히고 있었다. 들리는 것과 듣고 싶은 것의 조우 앞에서 오래전 누군가 반딧불이 사라지는 것은 오직 그 뒤를 쫓기를 포기하는 한에서만이라고 말했던게 생각났다. 이곳에서도 오래된 존재들이 사라지더라도 기억의 기본단위 만큼은 사그라들지 않고 조용히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을 읽는다. 그 목소리는 반짝이는 잔상에서 일식을 목격하는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겐 환한 낮에도 캄캄한 밤하늘이 보일 것이다. 온기로 충분히 데워진 나무 조각을 내려놓자 불빛도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 ✕ ✕ ✕✕ ✕ ✕ ✕✕ ✕ ✕
속닥속닥 웅성웅성 웅얼거리는 소리. 어디선가 작은 장면들이 그림자만 남긴 채 달아나는 소리가 들린다. 하얗고 푹신한 침대 아래에서 ‘부분이 되기’3 위한 소리 그림자를 찾았다. 몸에 힘을 풀고 그 위에 누우니 접촉면의 압력과 굴곡에 따라 무언가 밀려온다. 몸의 무게 중심에 따라 바닥이 흔들리고 파도가 치듯 진동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길 반복한다. 마치 파도에 올라탄 듯하다. 일렁이는 물결 위에서 눈이 감긴다.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는 파도일까. 누가 누구에게 보낸 진동일까. 생각이 어느새 끝도 없이 사라져갔다. 소리와 파도와 진동과 물결과 듣는 몸이 어느새 하나의 리듬으로 나란해진다. 여전히 파도가 치고 있는 몸을 일으켜 ‘들리는 점’4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그곳에서 소리의 그림자마다 표식을 남긴 작은 지도를 발견한다. 손으로 돌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던 날의 기록이다. 같은 곳을 두드린다고 생각했지만 돌의 몸을 모르기에 항상 다른 곳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던 날이었다. 수없이 많은 두드림 속에서 점과 점의 연속이었던 소리가 선이 되는 순간이 있었고, 그건 분명 언젠가 파도에 올라탄 적 있던 돌의 기억이었다. 소리와 소리로 연결된 몸들이 부드럽게 이어진 곡선들로 종이 위에서 출렁인다. 바깥으로 ‘향하는 귀’에서 뒤로 세 걸음, 앞으로 한 걸음 움직이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동쪽으로 여섯 걸음,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서쪽으로 두 걸음, 물결치는 소리. 고개를 움직여보고 턱끝을 들어보고 어깨를 올렸다가 무릎을 굽혔다가 편다. 몸이 이렇게 많은 각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며 손가락 사이로, 목 뒤로, 왼쪽 옆구리로, 콧등 위로 흘러가는 소리와 기꺼이 부딪힌다. 몸을 통과하는 소리를 듣는 다양한 자세들이 듣는 몸과 말하는 몸 사이에 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여전히 어둠 속에서는 ‘이격을 위한 그림자’5가 반복 재생되고 있다. 물과 빛과 바람이 만든 영화는 항상 ‘이미’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상영 시간을 맞춰갈 수도, 원하는 장면을 선택해서 볼 수도 없다. 들려지는 소리에 몸을 맞추듯 눈앞의 우연이 펼치는 장면 앞에 그저 자리 잡는 것이다. 물 소리 그림자를 찾던 발자국이 마른 하천을 발견했고, 남겨진 물의 흔적을 듣고자 다시 그곳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그곳에는 전날 내린 비로 빗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전보다 더 커다란 렌즈가 된 잔잔한 수면에 햇살이 비추자 윤슬이 만들어졌고 바람에 일렁거리며 반사된 이미지가 근처 나무와 바위를 스크린 삼아 몸을 펼쳤다. 그리고 극장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그곳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는 그 시간 같은 장소를 ‘다시’ 방문함으로써 보게 된 우연의 산물이었다. 나지막하게 물결이 찰랑이는 소리와 얕은 바람 소리, 작은 모래알이 움직이는 소리와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스크린 바깥에 존재했었다. 소리를 담아올 수도 있었지만 관찰자는 이미지 또한 소리 흔적이라고 생각하며 녹음기를 켜지 않았다. 아마 빛을 매개로 바위와 나무를 향해 새겨지는 소리 그림자를 곧 보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바위에는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이 영화가 수없이 반복되고 반복된 이후의 어느 날 다시 그곳을 방문할 발걸음을 떠올려 본 것이다. 그때 물과 돌과 바람의 소리로부터 탈각된 그림자는 바위에 어떤 형상을 남기게 된다.
들렸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도. 눈으로 듣고 발바닥으로 듣고 손톱으로 들을 때 그때의 감각을 소리로 표현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인지하며, 나아가 어떻게 다시 다른 이에게 설명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이미 몸에 파동으로 도달한 소리를 어떻게 알아챌 수 있을까. ‘이미’라는 단어 속에서 시차를 두고 흩어진 소리의 잔상을 다시 주워 과거의 몸을 조립할 수 있을까. 이 모든 듣기와 다시 듣기의 과정 에서 소리는 같은 형태로 존재할까. 소리가 매질을 통과할 때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면 ‘나’를 거치며 변형되는 소리를 ‘너’와 나눌 수 있을까. 우리가 모두 각기 다른 몸으로 소리를 받아들인다면 함께 듣고 있음은 과연 어떤 형태로 공유될 수 있는 것일까. 소리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표현 수단 중 하나인 언어 안에서도 이처럼 끝없이 모양을 바꾸고 증식한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동안 소리는 멀리 흘러가고 있다. 인간은 아마 소리의 한참 뒤에서 그것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것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늘 아래에 드리운 구름의 그림자를 밟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물기를 느끼는 것처럼. 끝도 없이 펼쳐진 소리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들은 걸 망각하고 들은 걸 기억하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갈 것이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들려진다’라는 말을 쓰고 싶은 순간이 있다. 이중 피동을 거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감각. 수많은 매질을 거쳐 몸에 도달한 다중 피동의 흔적들을 말하기 위한 연습. “나는 이 영화를 동굴의 입구에서도 본 적이 있다”6. 멀리 붙잡을 새 없이 저만치 흘러간 소리들이 그림자의 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라지기 전의 잔향 조각, 듣는 이를 위해 남겨진 자국, 붙잡는 이의 몸에 걸린 파편들, 소리를 뒤따르는 발자국의 푸티지들이 어느새 동굴 옆 강가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각주]
1. 다와다 요코, <목욕탕>, 을유문화사, 2011, 14p. 을유문화사에서 2011년 발행한 <목욕탕>은 본문의 텍스트가 모두 같은 파란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2. <조용히 기억되는, 별의 의지>(오로민경)
3. <부분이 되기>(다이애나밴드)
4. <들리는 점>(다이애나밴드)
5. <이격(耳擊)을 위한 그림자>(김그레이스)
6. 김그레이스
전시 <Unmute Water: 음소거된 물의 소리>(2023) 연계 텍스트
참여작가: 다이애나밴드(신원정, 이두호), 오로민경, 김그레이스
일시: 2023. 11.11-12.2
장소: 감저갤러리
워크샵: 이유진, 미술관옆집
디자인: 즈즈스 스튜디오
공간 설치: 우주우공방
코디네이터: 조은
전시 기록: 까마귀픽쳐스
기획: 김그레이스, Unmute Water 프로젝트
주최·주관: Unmute Water 프로젝트 ㅣ 협력: 미술관옆집 ㅣ 후원: 제주문화예술재단, 제주특별자치도
텍스트를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대체하는 이미지
*
현장 연구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