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우주의 강아지의


여기 눈앞에 있는 것들을 무어라 부를까. 이전의 이름으로는 더 이상 부를 수 없을 만큼 형체를 잃어버린 조각들. 길에서 주웠거나,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거나, 망가진 걸 고쳤거나, 깨진 걸 다시 붙인 사물들. 여기 놓인 존재들은 생과 죽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생과 죽음 사이 어디쯤 있을지 추측할 수 없다. 언제 소리 내거나 흔들리거나 다시 움직일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나뭇잎이, 종잇조각이, 비닐봉지가, 길고양이의 집이, 종이상자가, 찢긴 현수막이 그저 여기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것이 이름을 기억해낼 때까지 기다리거나 새로운 이름을 속삭이면서.

우-주-의-강-아-지-

이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우주의 강아지’라는 이름을 읽는다. ‘의’라는 조사에는 스물한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대체로 앞의 단어가 관형어 역할을 하며 뒤의 단어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니 ‘우주의 강아지'는 소속이나 포함 관계로 해석해서 ‘우주가 소유한 강아지’ 혹은 ‘우주에 살고 있는 강아지'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주에 소속되어 있거나 우주에 있다는 의미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 모두 우주에 살고 있고, 우리 모두 우주에 속한 존재들이라면 굳이 그걸 한 번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우주는 너무 넓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면 그것을 둘러싼 작은 세계에서부터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디에서 태어났고 친구는 누구이고 집은 어디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등등. 그런데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이 무한한 시공간을 공간적 범주로 설명하니 어떠한 소속과 포함의 관계도 갖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언가가 우주에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한다’는 걸 암시하기도 하는 걸까. 너무 긴 시간과 너무 큰 공간 그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는 세계로서의 우주. 이런 생각들을 할 때쯤 어디선가 밝고 슬픈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녕, 우주, 생일 축하해"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휴게소에서 삼천 원 정도에 파는, 건전지로 작동하는 강아지 인형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다. 우주의 어딘가에서 태어났을 ‘우주의 강아지’는 지금 우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중이다. 우주보다 먼저 태어난 강아지가 막 태어나려는 우주를 바라본다. 우주의 강아지의 눈으로 보는 우주는 작은 것들로 가득차 있다. 씨앗이 태어나고, 조개껍데기가 태어나고, 마른 풀이 태어난다. 노량진 수산시장이 태어나고 이어서 농성장도 태어난다. 깃털이 태어나고 돼지가 태어나고 나뭇가지가 태어난다.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 로힝야 난민 여성들의 회복을 돕는 평화의 집 ‘산티카나’가 태어난다. 단풍잎이 태어나고 나뭇잎이 태어나고 나비가 태어나고 강아지풀이 태어난다. ‘다 잘될거야' 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미얀마의 소녀가 태어난다. 이 모든 탄생이 구겨진 종이 상자로 만든 무대 위에 자리를 잡고 나니 그것이 우주임을 증명하듯 한 마리 나비가 그 위를 회전한다. 탄생을 축하하듯 환영하듯 기뻐하듯 나비가 그 위를 몇 바퀴쯤 돌았을까.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주가 죽는다”. 태어난지 몇분 되지 않은 사물들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너무나 가볍게 있던 자리에서 뽑혀나가는 사물들이 보인다. 우주에서 다시 하나둘씩 존재들이 사라져간다. 우주 바깥으로 꺼내어진 씨앗, 마른 풀, 조개껍데기, 깃털, 산티카나, 미얀마의 소녀를 보며 우주의 강아지도 죽기로 결심한다. 작은 몸에 전구를 감고 가장 밝은 모습으로. 안녕.

우주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우주의 강아지의 죽음. 이것은 공연 <우주의 강아지>의 서사이다. 우주의 강아지는 우주의 씨앗과 우주의 조개껍데기, 우주의 노량진 수산시장 등 우주에 태어난 작은 것들의 존재를 기억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우주라는 광활하고 먹먹한 세계 속에서 금새 사라지는 작은 존재들 곁에 ‘의'라는 한 점을 만드는 일이다. 우주의 강아지의 씨앗, 우주의 강아지의 조개껍데기, 우주의 강아지의 노량진 수산시장. 사라졌지만 기억한다면 영원한 시간 속에 머무를 것이라 믿으며 ‘의'로 연결되는 우주의 우리가 태어난다. <우주의 강아지>는 우주에 태어나고 사라져간 수많은 이름을 불러보고 함께 기억하는 ‘의'의 공동체를 만드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우주에는 수많은 존재들이 태어나고 사라지지만 기억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기억은 그것보다 조금 더, 혹은 영원히 이 세계에 머무르며 이야기를 쓴다. 기억을 회상할 인간이 사라진 이후의 세계에서 여전히 그 기억을 담지한 누군가가, 그리고 그 기억을 회상하게 해줄 사물들이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로민경은 스스로 기억하고 기억을 전달하는 사물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것의 첫 번째 삶을 애도하고 두 번째 삶을 축하한다. 언제 소리 내거나 흔들리거나 다시 움직일지 모를 사물들이 나비처럼 잠들어 있는 자리에서 오로민경의 작업은 마치 그 곁에서  자장가처럼, 생일축하노래처럼, 진혼곡처럼 머무른다. 부서진 기억의 조각들 속에서 ‘우리'를 찾는 노래를 들으며, 함께 그 노래를 들을 친구들을 찾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강아지야 그 후에 이렇게 접는 거야. 우리들 사이에 시간이 있음을 잊지마. 우린 언제나 긴 시간 속에 있어. 영원한 시간. 영원한 사랑”

나비가 강아지에게 보냈던 편지의 글자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나비가 강아지에게 접으라고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생이었을까. 마음이었을까. 눈물이었을까. 시간이었을까. 우리가 목격한 우주의 탄생과 죽음은 지나간 일들일까, 앞으로 펼쳐질 사건일까,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장면들일까. 저멀리 나비의 목소리를 따라 아득한 과거와 막연한 미래 사이의 시간을 접는 강아지가 보인다. 언젠가 긴 시간의 선이 하나의 점이 되는 순간을 볼지도 모른다. 그땐 영원한 시간과 영원한 사랑이 머물 만큼 안전하고 따뜻한 우주를 볼 것이다. 우주의 강아지의 탄생과 죽음. 이 짧은 공연 이후 우주의 우리는 다시 무수히 많은 탄생과 죽음을 목격하며 이곳에 남아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의'로 연결되는 무수히 많은 이름들을 이어보고 세어보는 일이 아닐까. 작은 행동, 작은 마음, 작은 존재들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의 우주의 강아지의 난민캠프의 세월호의 씨앗의 노량진의 나비의 로힝야 소녀의 …



오로민경 공연 <우주의 강아지>(2022) 비평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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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향한 노스탤지어>(파트리시오 구스만, 2010)을 보던 시기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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