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이라는 호명을 고민하며
누군가 ‘나를 난민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요청/요구해온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나는 난민이 아니다’라는 말과는 조금 다르게 들릴 것이다. 그 말은 난민이지만 그저 난민이기만 한 것은 아닌 누군가의 이야기가 여기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때의 응답은 단지 ‘난민’이라는 단어만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정체성과 그것을 결정짓는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에 국한해서만 이야기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이야기로 그를 인지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야기로 존재를 입증받길 원하는 목소리의 등장과 그동안 법의 언어와 미디어의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집단으로만 호명되어온 여러 삶이 발화하기 시작하는 흐름 속에서 말과 글의 영역에서는 난민을 주체로 한 여러 시도가 나타났다. 이 글에서는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등장하는 목소리들 뒤로 여전히 남아있는 ‘얼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목소리의 주인을 상상하거나 목소리의 얼굴을 마주 볼 때면 떠오르고야 마는 여러 이미지. 글과 말이라는 수단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특정 이미지. 나를 그런 이미지로 보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이 상상하고야 마는 바로 그 이미지는 눈앞에 마주한 얼굴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한다. 아마 목소리 없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단단한 하나의 얼굴을 깨부수고, 그 뒤에 감춰진 수많은 얼굴들을 보는 일이 아닐까. 호명의 문제는 무엇보다 시선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나를 난민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말에 응답하는 일은 눈앞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질지 모른다.
“때때로 한국 사람들은 ‘난민’을 직업이나 직함처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난민’이라는 단어가 한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해 버리는 것 같아요. 여기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늘 “난민, 난민”이라고 소개해요. ‘난민’이라는 단어를 먼저 언급하는 순간 이미 편견이 생겨요. 그럼 사람들은 그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거예요. 그들이 달라서가 아니라 ‘난민’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래요.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난민다운 옷차림’이라는 말
한국 사회에서 난민의 얼굴은 2018년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때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바로 난민의 겉모습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난민의 모습을 찍은 미디어의 사진에 가장 많이 달린 댓글들은 가장 먼저 이들의 ‘난민답지 않은’ 옷차림과 ‘난민답지 않은’ 겉모습을 지적하고 있었다. 난민이 왜 비싼 아이팟을 끼고 있냐고 묻고, 신발이 너무 깨끗하고 양복을 입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고 하며, 전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할 난민”이 아닌 표정을 짓고 있다고 의아해했다. 그동안 주로 참상의 현장에서 보도사진으로 찍힌 난민의 이미지를 ‘난민다운’ 모습이라고 인지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입고 혹은 더 잘 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가짜’ 난민이라는 의심이 들게 했으며 이것은 점차 난민 반대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몇몇 사람들만의 오해나 해프닝으로 그칠 것 같은 무지한 의심 같아 보이지만 낯선 타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그러한 물음들을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바꿔갔다. “난민보다 국민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은 점차 난민이라면 응당 정치적인 박해나 자연재해와 같은 생사의 문제가 걸린 상황으로 인해 한국에 도달했으나 그것이 경제적인 목적은 배제한 ‘순수한’ 사정이어야 하고, 종교적으로 위험하지 않거나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한국말과 한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범 시민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기대에 어긋나는 이미지들은 난민이 맞는지를 판별하는 시험대에 오르며 난민 반대 운동과 정부의 난민 정책은 ‘진짜’ 난민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그 속에서 안전하게 좁힌 난민 정체성이 법적 해결을 위해 필요한 사항이 됨에 따라 난민 인정과 난민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이 한때 이러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다. 하지만 옷차림이 너무 깔끔하다고 난민이 맞는지 의심하고, 노숙자보다 말끔하다고 난민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난민다운’ 이미지란 과연 무엇인가? 난민은 외양과 특정 기호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정체성인가? 난민은 옷차림으로 자신이 난민답다는 것을 표현해야만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계속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 심리적 안도감을 주는가? 무엇보다 겉모습만으로 그 사람에 대해 전부 알 수 있다는 오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접힌 이미지
“1994년 이후 2019년 8월까지 난민인정 신청에 대한 심사결정이 종료된 건은 2만 6천명이지만, 이 중 난민인정을 받은 사람은 964명이고,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은 사람은 총 2,145명”이다. ‘난민’이라는 단어 안에는 난민으로 호명되지만, 난민의 이름으로 살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난민 인정을 받기 위해 무기한 기다리는 사람,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고 한국에 남아 최소한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난민 인정을 받은 극소수의 사람,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해 한국을 떠나는 사람, 자취를 감춘 사람 등 다양하다. 이들은 법이 보호하는 범위도 다르고, 출신국도 종교적, 문화적 배경도 다르며 삶의 방향성도 다르지만 모두 ‘난민다움’이라는 좁게 접힌 이미지 안에 살아간다는 점은 같다. 이처럼 ‘무엇다움’이라는 영역 속에 좁게 접힌 이미지들이 ‘난민’뿐만인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는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탈북자, 장애인, 성 소수자, 국가폭력의 피해자 등 이미 난민화된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이 있다. 난민과 난민화된 삶은 분명 다르지만, 그 접점에는 각각의 정체성을 ‘무엇다움’에 구속하는 인식과 논리가 존재한다. 겉모습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잣대의 난점, ‘무엇다움’에 갇혀 살아가는 이들의 공통된 이미지들과 그럼에도 다른 개개인의 삶을 함께 사유하면서 좁게 접힌 이미지의 바깥을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최근 시각예술의 영역에서는 난민을 주제로 기존의 낡고 견고한 이미지 주변부를 확장할 수 있게 해주는 예술적 실천들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운동과 정치를 위한 이미지가 아닌 ‘무엇다움’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욕망과 삶의 문제를 다루는 이미지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난민의 옷차림, 난민의 겉모습을 둘러싼 질문들 속에 갇힌 실제 삶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시도들이 여전히 부족한 현실이다. ‘난민다움’이라는 말이 지닌 폭력성을 예감하면서도 그러한 이미지 바깥을 열어내는 작업을 발견하지 못한 실패의 시간 속에서, 이 글은 접힌 영역 그 바깥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재현의 시도를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그것은 ‘난민’보다 먼저 미디어와 일상적 편견을 통해 견고하게 굳어진 ‘이주노동자’라는 이미지가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에 틈을 내기 시작하는 시도이다. 옷차림과 겉모습에 대한 단단한 편견과 시선의 문제를 유쾌하게 비틀어 펼쳐내는 ‘이주노동자’ 재현의 사례를 통해 ‘난민’의 겉모습에 대한 상상을 이어가며 이 글에서는 무엇보다 ‘즐겁고 가볍게 일상과 접촉하는 힘’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중략)
<난민, 난민화되는 삶>(2020, 갈무리)
공동저자: 김기남, 김현미, 도미야마 이치로, 미류, 신지영, 심아정, 심정명, 송다금, 이다은, 이용석, 이지은, 전솔비, 쭈야, 추영롱
재현와 표현. 표현하려는 누군가의 욕망을 재현의 틀 안에서 이야기하려 하는 것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