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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onustex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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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6 Feb 2023 06:56:4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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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ext-한계의 장소로부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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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5 Jan 2023 07:41:0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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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한계의 장소로부터


그날의 기억은 마포구에 위치한 홈플러스 계산대 앞에서 마주했던 MBK 매각 규탄 시위 장면에 멈춰있다. 마트 안을 나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바깥과의 경계에서 만들어진 임시 광장. 잠시 시위를 하기 위해 일을 멈추고 모인 사람들, 함께 하지 못하고 계산대에서 묵묵히 바코드를 찍는 사람들, 감시하듯 저 멀리서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 그리고 약간은 불만 섞인 표정으로, 혹은 어찌할 바 모르는 당혹스러움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역할로만 나누어져 있던 이 공간이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로 분해되는 순간. 설마 친절하고 편안해야 할 마트 안에서 이런 걸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들과 조금 전 나에게 야채의 무게를 달아주고, 생선의 가격을 설명해주고, 내 카트를 조심스럽게 피해 걷던 직원들이 나를 가로막고 설 줄 몰랐다는 표정들이 나타난다. 몇 개의 이미지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 날의 장면은 당시 들었던 어떤 소리들로 더욱 선명해져 갔다. 그것은 마트 ‘안’에서 ‘이런 걸’ 봐야 하는 사람들을 멈춰 세우는 시위의 문장이 여전히 ‘고객님’으로 시작해서 높임말로 끝나는 풍경이었다.

얼핏 마트 직원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공손함을 잃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은 계산대 앞의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만듦에 대해 사과하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잠시 후면 다시 돌아가야 할 일터이기도 한 간이 무대의 미약한 힘과 이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만들어질 침묵의 소음을 예견하듯이 그들은 한계의 장소 위에 정확히 한계의 언어로 서 있었다.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다소 건조하게 진행된 이 짧은 시위는 그렇게 일면식 없는 고객님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듯, 호응과 응원 없는 차가운 현장에 개의치 않는 듯, 할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싸움이지만 이곳(에서 우리의 노동)을 이용하는 당신들도 외면할 수 없다는 당당함을, ‘우리’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상황을 알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일’임을,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해서 일터의 갑질을 참는 것이 아니었음을 표현하는 몇 겹의 두터운 제스처였음을 회상해본다.

그렇게 일상 속 투쟁과 투쟁 속 일상을 가로지르는 장소 위에서 직원과 손님, 당사자와 관중, 계속 있을 사람과 스쳐지나갈 사람의 거리를 재확인하게 했던 짧은 퍼포먼스. 한계를 전면에 내세운 그 날의 장면은 연대, 동참, 공동체를 지향하는 마트 안의 모든 ‘우리’를 손쉽게 말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지금 여기서 ‘외치고 있는 우리들’을 가시화했다. 그날 이후 마트를 가면 종종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마주쳤다. 점차 마트 안에서 시위를 보는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한계의 장소처럼 보이는 곳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느꼈다. 어떤 장소와 활동에 대해 ‘한계’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이 행위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이미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만 나오는 몸짓들을 모으기 위한 ‘시작’의 언어가 될 수 있을지 찾고 싶었다.

&#60;img width="4032" height="3024" width_o="4032" height_o="3024"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a3a3bd094d24b01054ad6bac1827ff0fa2d2d3a5985de7a900283e4d2b574a1a/1.jpeg" data-mid="165942705"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a3a3bd094d24b01054ad6bac1827ff0fa2d2d3a5985de7a900283e4d2b574a1a/1.jpeg" /&#62;
기억 속에서 이번 여름 제주의 따가운 햇볕 아래 함께 걸었던 강정마을 앞바다가 선명히 떠올랐다. 서울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제주로 가야 한다. 지도를 좀 더 줌 아웃된 곳으로 이동시킨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앞 작은 광장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정오가 되면 인간띠 잇기가 진행되는 곳이다. ‘인간띠 잇기’는 매일 나오는 사람과 새로 온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발언하고 해군기지 정문 앞까지 행진하고 강정 댄스를 함께 춘 뒤 해산하는 짧은 시위이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이미 그곳의 활동가들에게는 당연한 일과인 이 자리에 이끌어준 친구는 이것을 ‘일상 투쟁 활동’이라고 불렀다. 무거운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투쟁’이라고 하니 부담이 됐지만 실제로 그곳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노래와 춤은 역동적이었고 반겨주는 사람들과의 눈인사에 경직된 몸과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깃발과 현수막을 하나씩 든 채로 기지 정문 앞까지 행진하고 그 앞에서 빙빙 돌며 춤을 추자 관계자와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긴장감이 제법 가까이에서 느껴지기도 했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얼굴들이 보여서 바로 안심이 되었다. 그날 저 멀리 보이는 해군기지는 크고 넓었고,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제주의 바다와 하늘은 새파랗고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 강정천으로 흘러가는 맑고 투명한 냇길이소 앞에 소원 없이 쌓아 올린 돌탑 하나를 남겼다.

강정 마을 앞바다는 해군기지가 들어오기 전까지 주민들이 구럼비를 기리고, 흘러나온 강정천이 바다와 만나고, 여름이면 얼음장같은 물이 더위를 식혀주던 장소였다. 삶의 터전이었을 그 길목에서 공사 반대를 외치고 해군기지 백지화를 외치며 시작된 인간 띠잇기였지만 이미 완공된 기지와 함께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곳에 매일 모인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현장에서 여전히 똑같이 평화의 구호를 외치고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똑같은 춤을 추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이 ‘일상 투쟁 활동’을 두고 누군가는 ‘그런 걸’로는 이미 지어진 해군기지를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아직 오지 않을 미래와 이미 와버린 미래 위에서 이곳의 사람들은 한계의 감각을 익히고, 한계의 몸짓을 연습하며, 한계의 장소에 맞게 살아간다. 기지가 들어섰다고 해서 끝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매일 평화를 바라고 자연을 아끼는 마음으로 그곳의 하루를 열고, 하루에 한 번은 꼭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과 깃발을 해군기지와 저 멀리 강정 앞바다에 보여준다.

대만에서 오키나와, 제주, 진도, 밀양, 고리 등을 자전거로 순례하며 한계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주민운동과 사회운동의 목소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38;lt;다른 세계&#38;gt;(2017)에는 오키나와의 다카에와 헤노코에서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시위 장면이 나온다. 이곳은 2004년부터 지금까지도 기지 입구에서 사람들이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우리가 사는 이곳에 기지를 건설해서는 안된다가 아니라, 그런 기지는 어느 곳에도 필요 없다고 외친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작고, 기지 건설 현장의 소음은 너무 크고, 자연은 무참히 무너져가고 주민들이 슬퍼하는 장면들이 이어지는데 잠시 후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나온다. “헤노코에 다시 들렀다. 어쩐 일인지 그날 공사 차량이 오지 않았고 주민들은 신이 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단 하루 공사가 중단되었던 날, 기지 앞에 시위하러 나온 주민들은 기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축제 분위기로 건설 현장 앞이 떠들썩하니, 마치 공사가 완전히 중단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마 내일은 공사가 재개될 것이고 주민들도 그것을 경험적으로 알 것이다. 그런데도 온 힘을 다해 기뻐하는 그 장면을 보며 한계의 장소 너머를 떠올렸고 이곳의 사람들은 내가 아직 보지 못하는 더 먼 시공간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다카에와 헤노코의 주민들은 공사가 중단될 때마다 축제처럼 기뻐하고, 강정 마을 주민들은 매일 인간 띠잇기를 하며 춤을 추고,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웅성웅성 그 주변에 몰려들며 그곳의 공기를 매일 자신들의 숨과 땀으로 섞어놓는다. 그렇게 한계의 장소마다 한계의 언어가, 다시 한계의 몸짓이 생긴다. 처음 온 사람에게는 똑같은 게 반복되는 것 같겠지만 그것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한계라고 불리는 곳을 점유해나갈 것이다. 이제 막 만들어진 한계의 장소들과 이미 저멀리 가고 있는 한계의 장소들을 느슨하게 이어보며 큰 이상과 작은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과 행동하는 순간에 대해, 혹은 현장의 오브제와 미술의 자리이동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고민이 끝난 것처럼 간단히 문제의 맨 앞자리를 점유하곤 하는 이미지, 텍스트들 속에 여전히 이동 가능한 자리가 남아있는지 찾고자 하는 노력과도 긴밀하게 연결될 것이다. 일레인 스캐리의 말처럼, 실재하는 부분적인 대상이 상상 속 거대한 세계의 규모를 넘어서는 순간을 기다리며. 한계의 장소로부터.

&#60;img width="4032" height="3024" width_o="4032" height_o="3024"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aca5e765d5e678698e47a40c5c84110af06b843219387998711ee2963e208296/2.jpeg" data-mid="165942706"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aca5e765d5e678698e47a40c5c84110af06b843219387998711ee2963e208296/2.jpeg" /&#62;“인간은 도시 하나를 상상하지만 그 대신 집 한 채를 ‘만들고’, 정치적 유토피아를 상상하지만 그 대신 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며, 세계에서 고통을 없애는 일을 상상하지만 그 대신 친구가 건강을 회복하도록 간호한다. 인공적인 것은 이렇듯 상상하기보다 온건하고 단편적이지만, 그 대상은 상상된 대상과 비교했을 때 실제라는 엄청난 이점을 지니며 또 실제이기 때문에 공유 가능하다. 그 대상을 공유할 수 있기에 마침내 인공적인 것은 상상하기에서의 규모만큼이나 큰 규모를 갖게 된다. 상상하기의 산물이 처음으로 집단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일레인 스캐리, 메이 옮김, 『고통받는 몸』, 오월의 봄, 2018, p277.)

전시 &#38;lt;광장/조각/내기&#38;gt;(2020) 연계 텍스트
기획: 권태현, 최황작가: 강은희, 김재민이, 주현욱, 차지량, 최태훈, 최황텍스트: 전솔비, 허호정디자인: 일상의실천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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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ext-한계의 장소로부터(2022/202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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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5 Jan 2023 07:40:0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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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한계의 장소로부터(2020/2022)*


그날의 기억은 마포구에 위치한 홈플러스 계산대 앞에서 마주했던 MBK 매각 규탄 시위 장면에 멈춰있다. 마트 안을 나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바깥과의 경계에서 만들어진 임시 광장. 잠시 시위를 하기 위해 일을 멈추고 모인 사람들, 함께 하지 못하고 계산대에서 묵묵히 바코드를 찍는 사람들, 감시하듯 저 멀리서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 그리고 약간은 불만 섞인 표정으로, 혹은 어찌할 바 모르는 당혹스러움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역할로만 나누어져 있던 이 공간이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로 분해되는 순간. 설마 친절하고 편안해야 할 마트 안에서 이런 걸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들과 조금 전 나에게 야채의 무게를 달아주고, 생선의 가격을 설명해주고, 내 카트를 조심스럽게 피해 걷던 직원들이 나를 가로막고 설 줄 몰랐다는 표정들이 나타난다. 몇 개의 이미지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 날의 장면은 당시 들었던 어떤 소리들로 더욱 선명해져 갔다. 그것은 마트 ‘안’에서 ‘이런 걸’ 봐야 하는 사람들을 멈춰 세우는 시위의 문장이 여전히 ‘고객님’으로 시작해서 높임말로 끝나는 풍경이었다.

얼핏 마트 직원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공손함을 잃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은 계산대 앞의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만듦에 대해 사과하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잠시 후면 다시 돌아가야 할 일터이기도 한 간이 무대의 미약한 힘과 이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만들어질 침묵의 소음을 예견하듯이 그들은 한계의 장소 위에 정확히 한계의 언어로 서 있었다.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다소 건조하게 진행된 이 짧은 시위는 그렇게 일면식 없는 고객님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듯, 호응과 응원 없는 차가운 현장에 개의치 않는 듯, 할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싸움이지만 이곳(에서 우리의 노동)을 이용하는 당신들도 외면할 수 없다는 당당함을, ‘우리’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상황을 알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일’임을,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해서 일터의 갑질을 참는 것이 아니었음을 표현하는 몇 겹의 두터운 제스처였음을 회상해본다.

그렇게 일상 속 투쟁과 투쟁 속 일상을 가로지르는 장소 위에서 직원과 손님, 당사자와 관중, 계속 있을 사람과 스쳐지나갈 사람의 거리를 재확인하게 했던 짧은 퍼포먼스. 한계를 전면에 내세운 그 날의 장면은 연대, 동참, 공동체를 지향하는 마트 안의 모든 ‘우리’를 손쉽게 말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지금 여기서 ‘외치고 있는 우리들’을 가시화했다. 그날 이후 마트를 가면 종종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마주쳤다. 점차 마트 안에서 시위를 보는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한계의 장소처럼 보이는 곳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느꼈다. 어떤 장소와 활동에 대해 ‘한계’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이 행위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이미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만 나오는 몸짓들을 모으기 위한 ‘시작’의 언어가 될 수 있을지 찾고 싶었다.

(사진의 절반 이상을 채운 맑고 파란 하늘 아래로 강정 앞바다가 보이고 정오의 햇빛이 한줄기 흰 선을 그리며 내려오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해군기지가 있고 하늘에는 군용 헬리콥터 한 대가 날고 있는 것만 빼면 얼핏 그저 아름다운 풍경 사진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사진 속 군부대와 멧부리의 경계에 있던 철조망 울타리는 2년이 지난 지금, 돌로 만든 두꺼운 벽으로 바뀌었고 공사로 인해 멧부리 땅은 더 좁아졌다.)

기억 속에서 이번 여름 제주의 따가운 햇볕 아래 함께 걸었던 강정마을 앞바다가 선명히 떠올랐다. 서울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제주로 가야 한다. 지도를 좀 더 줌 아웃된 곳으로 이동시킨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앞 작은 광장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정오가 되면 인간띠 잇기가 진행되는 곳이다. ‘인간띠 잇기’는 매일 나오는 사람과 새로 온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발언하고 해군기지 정문 앞까지 행진하고 강정 댄스를 함께 춘 뒤 해산하는 짧은 시위이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이미 그곳의 활동가들에게는 당연한 일과인 이 자리에 이끌어준 친구는 이것을 ‘일상 투쟁 활동’이라고 불렀다. 무거운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투쟁’이라고 하니 부담이 됐지만 실제로 그곳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노래와 춤은 역동적이었고 반겨주는 사람들과의 눈인사에 경직된 몸과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깃발과 현수막을 하나씩 든 채로 기지 정문 앞까지 행진하고 그 앞에서 빙빙 돌며 춤을 추자 관계자와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긴장감이 제법 가까이에서 느껴지기도 했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얼굴들이 보여서 바로 안심이 되었다. 그날 저 멀리 보이는 해군기지는 크고 넓었고,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제주의 바다와 하늘은 새파랗고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 강정천으로 흘러가는 맑고 투명한 냇길이소 앞에 소원 없이 쌓아 올린 돌탑 하나를 남겼다.

강정 마을 앞바다는 해군기지가 들어오기 전까지 주민들이 구럼비를 기리고, 흘러나온 강정천이 바다와 만나고, 여름이면 얼음장같은 물이 더위를 식혀주던 장소였다. 삶의 터전이었을 그 길목에서 공사 반대를 외치고 해군기지 백지화를 외치며 시작된 인간 띠잇기였지만 이미 완공된 기지와 함께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곳에 매일 모인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현장에서 여전히 똑같이 평화의 구호를 외치고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똑같은 춤을 추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이 ‘일상 투쟁 활동’을 두고 누군가는 ‘그런 걸’로는 이미 지어진 해군기지를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아직 오지 않을 미래와 이미 와버린 미래 위에서 이곳의 사람들은 한계의 감각을 익히고, 한계의 몸짓을 연습하며, 한계의 장소에 맞게 살아간다. 기지가 들어섰다고 해서 끝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매일 평화를 바라고 자연을 아끼는 마음으로 그곳의 하루를 열고, 하루에 한 번은 꼭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과 깃발을 해군기지와 저 멀리 강정 앞바다에 보여준다. 

(이 자리에는 맑은 물이 햇빛에 반짝이는 강정의 냇길이소를 배경으로 놓인 작은 돌탑에 초점이 맞춰진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 돌탑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무너졌는지 누군가 모르고 밟고 지나갔는지 다시 갔을 때에는 찾을 수 없었지만 대신 다른 누군가가 쌓아올린 돌탑들을 보았다.)

대만에서 오키나와, 제주, 진도, 밀양, 고리 등을 자전거로 순례하며 한계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주민운동과 사회운동의 목소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38;lt;다른 세계&#38;gt;(2017)에는 오키나와의 다카에와 헤노코에서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시위 장면이 나온다. 이곳은 2004년부터 지금까지도 기지 입구에서 사람들이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우리가 사는 이곳에 기지를 건설해서는 안된다가 아니라, 그런 기지는 어느 곳에도 필요 없다고 외친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작고, 기지 건설 현장의 소음은 너무 크고, 자연은 무참히 무너져가고 주민들이 슬퍼하는 장면들이 이어지는데 잠시 후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나온다. “헤노코에 다시 들렀다. 어쩐 일인지 그날 공사 차량이 오지 않았고 주민들은 신이 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단 하루 공사가 중단되었던 날, 기지 앞에 시위하러 나온 주민들은 기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축제 분위기로 건설 현장 앞이 떠들썩하니, 마치 공사가 완전히 중단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마 내일은 공사가 재개될 것이고 주민들도 그것을 경험적으로 알 것이다. 그런데도 온 힘을 다해 기뻐하는 그 장면을 보며 한계의 장소 너머를 떠올렸고 이곳의 사람들은 내가 아직 보지 못하는 더 먼 시공간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다카에와 헤노코의 주민들은 공사가 중단될 때마다 축제처럼 기뻐하고, 강정 마을 주민들은 매일 인간 띠잇기를 하며 춤을 추고,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웅성웅성 그 주변에 몰려들며 그곳의 공기를 매일 자신들의 숨과 땀으로 섞어놓는다. 그렇게 한계의 장소마다 한계의 언어가, 다시 한계의 몸짓이 생긴다. 처음 온 사람에게는 똑같은 게 반복되는 것 같겠지만 그것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한계라고 불리는 곳을 점유해나갈 것이다. 이제 막 만들어진 한계의 장소들과 이미 저멀리 가고 있는 한계의 장소들을 느슨하게 이어보며 큰 이상과 작은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과 행동하는 순간에 대해, 혹은 현장의 오브제와 미술의 자리이동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고민이 끝난 것처럼 간단히 문제의 맨 앞자리를 점유하곤 하는 이미지, 텍스트들 속에 여전히 이동 가능한 자리가 남아있는지 찾고자 하는 노력과도 긴밀하게 연결될 것이다. 일레인 스캐리의 말처럼, 실재하는 부분적인 대상이 상상 속 거대한 세계의 규모를 넘어서는 순간을 기다리며.** 한계의 장소로부터.
&#60;img width="2667" height="2000" width_o="2667" height_o="2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dfcf147d4cc6094b93497d58d4a98523262a699e53e6eae421dd3d1b615927cd/_1.png" data-mid="165944369" border="0" data-scale="7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dfcf147d4cc6094b93497d58d4a98523262a699e53e6eae421dd3d1b615927cd/_1.png" /&#62;

&#60;img width="2667" height="2000" width_o="2667" height_o="2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8335a910b12786ac7c0a9e9d830067bb398c36ce1993978ffcf7ac41fe77c7bc/_2.png" data-mid="165944370" border="0" data-scale="7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8335a910b12786ac7c0a9e9d830067bb398c36ce1993978ffcf7ac41fe77c7bc/_2.png" /&#62;

&#60;img width="2667" height="2000" width_o="2667" height_o="2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2c7a4cfe65f536693dc20da6711a2ff9a1e15ce0e27b58f74a33947243a75b3e/_3.png" data-mid="165944371" border="0" data-scale="7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2c7a4cfe65f536693dc20da6711a2ff9a1e15ce0e27b58f74a33947243a75b3e/_3.png"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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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이미지는 기억 속 두 장소를 오가도록 돕는 매개체이자 그 자체로 어떤 현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글에 첨부했던 이미지들 중에 홈플러스 시위 사진이 없었다는 것과 강정 해군기지 앞 시위 사진 대신 주변 자연물들을 찍었다는 것은 당시 그 사건들을 바라보는 나에 대한 자각과 관련있다. 관찰자이자 방문객이었고 관광객이었으며 동료의 동료의 동료였고 동시에 애매한 거리의 기록자이자 목격자였던 나의 위치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2022년 6월 현재 인터넷에서 mbk 폐점매각이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본다. ‘될지도 모른다’라는 막연하고 모호한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막연함이 지배적인 한계의 장소에서, 현장의 상황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현장에서 보이는 것들은 그때와 같지 않다. 여전히 사람의 얼굴보다는 뒷모습, 자연물의 모습이나 펄럭이는 깃발을 보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들이 새로운 얼굴들이라는 점을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보통 글에 들어가는 이미지들은 특정 기억이나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환기하게 하며 내용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글로 굳이 쓰고 싶지 않은 것들을 대신 말해주거나 의외의 이야기를 숨겨두기도 한다. 2020년의 현장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지우고, 다시 방문한 곳에서 목격한 2022년의 이미지로 짧은 추신을 남긴다.

**“인간은 도시 하나를 상상하지만 그 대신 집 한 채를 ‘만들고’, 정치적 유토피아를 상상하지만 그 대신 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며, 세계에서 고통을 없애는 일을 상상하지만 그 대신 친구가 건강을 회복하도록 간호한다. 인공적인 것은 이렇듯 상상하기보다 온건하고 단편적이지만, 그 대상은 상상된 대상과 비교했을 때 실제라는 엄청난 이점을 지니며 또 실제이기 때문에 공유 가능하다. 그 대상을 공유할 수 있기에 마침내 인공적인 것은 상상하기에서의 규모만큼이나 큰 규모를 갖게 된다. 상상하기의 산물이 처음으로 집단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일레인 스캐리, 메이 옮김,『고통받는 몸』, 오월의 봄, 2018, p277.)
울산현대미술제 &#38;lt;시작부터 지금&#38;gt;(2022)
전시 연계 텍스트 큐레이션 글
예술감독: 박성환
큐레이터: 곽노원, 신양희
텍스트 큐레이션: 권태현
주최: 경상일보</description>
		
	</item>
		
		
	<item>
		<title>Text-멀고도 가까운</title>
				
		<link>https://sonustext.cargo.site/Text-8</link>

		<pubDate>Wed, 25 Jan 2023 07:39:26 +0000</pubDate>

		<dc:creator>sonustext</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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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멀고도 가까운*



(암전)

“여기는 군생활 구역으로서 당장 민간인 접근을 제한합니다. 여기는 군생활 구역으로서 당장 민간인 접근을 제한합니다.” 확성기 너머로 자동응답기처럼 똑같은 말이 울려퍼지고 있는 이곳은 제주 강정 해군기지와 멧부리가 철조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맞닿은 땅이다. 상체를 드러낸 유령처럼 분장한 여성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긴급하게 군인들이 모여든 모양이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서있을 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군사기지 앞에서 가슴을 드러낸 여성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당한 몸 가까이 가는 것이 두렵다. 순비기 나무가 옆으로 누워 길고 얇은 팔로 땅을 덮고 있는 이곳에 그녀가 은빛 몸으로 서있다. 한 다리로 균형을 잡고 나무처럼 꼿꼿이 선 등과 어깨 위를 따라 뻗은 팔이 보이고 손 끝에는 길게 자란 날카로운 손톱이 손거울을 움켜쥐고 있다. 살갗 위로 반짝이 가루와 구슬들이 빛나며 지는 해를 반사하는 그림자 뒤로 군인 두 세 명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성거린다. 다가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사람들. 지킬 수도 쫓아낼 수도 없는 장소.

‘서울에서 오신 예술가분들 Ghost sunset’은 웅장한 음악과 함께 아름다운 강정천과 멧부리, 해군기지와 강정 앞바다를 번갈아 비추는 풍경으로 시작한다. 거울을 들고 ‘고스트 댄스’를 추는 모습과 해군기지를 파노라마로 비추는 장면이 매끈하게 편집된 이것은 퍼포먼스 비디오일까. 하지만 곧 음악이 꺼지고 암전 이후 이어지는 본 영상은 웅성거리는 소음과 흔들리는 카메라, 그리고 ‘불청객들’을 보여주는 퍼포먼스 프레임 바깥을 비춘다. 현장에는 음악 대신 “찍지 말라고 해” 하는 명령어와 무전기 소리, 작지만 끊기지 않고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대치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조명)

“배경이 군사시설이다보니까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에 의해 군사시설을 찍으면 안되니까)” 찍지 말라는 말소리가 들린다. 철조망 뒤에 있어 누가 말하는 건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저희가 기지를 찍는 게 아니고 이 바다의 일부가 기지인 거라서요” 라는 말이 이어진다. ‘기지를 찍고 싶은 게 아니라 원래 기지가 오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멧부리를 찍고 싶은데, 강제적으로 기지가 건설되었고 배경으로 나오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어서 나오는 “군사보호구역이라서 사진촬영이 안된다” 라는 말은 앞에서 했던 말의 반복이고, “기지가 아니라 여기(멧부리)에서 하고 있다”, “우리가 서있는 곳은 기지가 아니라 멧부리다” 라는 대답도 앞에서 했던 말의 반복이다. 말들을 이어보니 두 목소리가 대화의 언저리에서 공회전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서로가 같은 말을 반복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이상한 장면. 분명 ‘말’을 하고 있는데 이쪽의 ‘말’들이 저쪽의 ‘말’들과 전혀 만나지 않는 대치상태. 이런 장면을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다. 

‘현실을 반영하지도 구성하지도 못하고 헛도는 법의 언어’와 대치하는 ‘생존을 요구하는 삶의 언어’, ‘모호한 거절’과 ‘명확한 요구’, ‘앞뒤가 맞지 않는 진상규명’과 ‘정확하고 날카로운 반박의 근거들’,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해명’과 ‘눈에 비친 세계를 이미 간파해버린 선언문’. 대치하는 몸들은 사라지더라도 대치하는 말들은 발췌되어 어딘가에서 떠도는데, 과거가 된 이미지 텍스트 속에서 이렇게 말들의 투명함이 보일 때가 있다. ‘서울에서 오신 예술가분들 Ghost sunset’은 군사기지 앞에서 ‘사진 몇 장 찍는’ 예술 작업처럼 서있을 뿐인 몸에 ‘반응’하는 세계를 카메라로 담는다. 말하고, 서있고, 듣고, 응시하고, 버티고, 방해받고, 저항하며, 함께 서있는 몸들에 세계가 ‘반응(reaction)’하는 순간. 그리고 그로 인해 그저 서있는 것이, 말거는 것이, 응시하는 것이, 침묵하는 것이, 응답하는 것이 ‘행동(action)’이 되는 순간까지. 퍼포먼스 바깥의 퍼포먼스를 향해.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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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오신 예술가분들 Ghost sunset, single channel video, 7:44, 2022

&#38;lt;불러내는, 악 Appellant, ARGH!&#38;gt;, &#38;lt;고스트 리허설 Ghost rehearsal&#38;gt;, &#38;lt;고스트 댄스 Ghost dance&#38;gt; 등 그간 몸의 수행성이 중심이 되는 퍼포먼스들을 이어온 흑표범의 작업 속에는 항상 ‘말’이 존재했다. ‘몸이 말한다’는 명제 속에서 나타나는 은유로서의 말이 아닌, 실제로 입으로 소리내며 등장하는 발화행위로서의&#38;nbsp; 말. 대화, 낭독, 합창, 고함, 고백, 선언. 말을 하는 행위는 흑표범이 함께 몸을 움직일 존재들과 작업에 선행하는 교감의 과정이었고 워크숍이자 리서치이자 작업의 재료이며 동시에 결과물로서 존재했다. 그렇게 밖에서 말을 거는 행위에 의해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난 말들은 어떤 식으로든 몸 안에서 무언가를 갖고 밖으로 나와 다른 이의 말들을 찾아갔다. 그 여정 속에서 흑표범 자신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몸을 북돋고 말할 수 있도록 타인과 자신의 몸을 단련해왔다. 

이번 개인전 &#38;lt;불청객 Uninvited&#38;gt;은 그간 여러 모양으로 작업 속에 존재해왔던 ‘말’의 모습이 현장을 배경으로 더 전면에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는 동료들이 있다. ‘서울에서 오신 예술가분들 Ghost sunset’이 퍼포먼스하는 몸을 등장시켜 대치하는 현장의 말들을 불러냈다면 ‘스틸, 강정 Ghost sunrise’은 시간이 흐른 후 퍼포먼스를 찍었던 장소를 다시 방문하며 ‘예술 이후’에도 나란히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장과 사건을 통해 동료로 만나면서 함께 만들어낸 예술 이후, 작업 이후, 전시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갈 수 있는 공통의 삶과 각자의 삶이 나란히 남아있음을 그들은 자연 속에서 느낀다.

여성, 우정, 환대, 친밀감, 운동, 응답, 연대, 공동체, 이것들은 미완성의&#38;nbsp; 단어들이다. &#38;lt;새로 태어난 여성 La Jeune Nee&#38;gt;(1975)에서 공동저자 카트린 클레망과 엘렌 식수는 ‘지배하지 않는 지식의 전달이 가능한가? 그것과 ‘여성적 글쓰기’, 혹은 ‘여성적 말하기’는 양립가능한 것일까?’를 논쟁하는 대화에서 뚜렷한 공통된 결론을 보지 못한다. 저널리즘과 정치운동에 몸담았던 클레망은 글쓰기가 개인적인 행위에 불과하며 사회 구조적인 변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비판하고 계급투쟁과 같은 정치적인 행위가 필요함을 역설하지만,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 가까웠던 식수는 언어의 힘과 예술적 상상력을 긍정하며 난해할지라도 여성적 글쓰기를 변혁의 원동력으로 강력하게 믿는다. 각각 정치적 운동, 학문 영역이라는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저자의 견해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이지만 이 둘은 ‘혼자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새로운 경지에 이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마지막 장인 3부 ‘교환’에서 둘 사이의 대화를 필사하여 남겼다. 둘 중 어느 한 사람의 글로 마치거나 종합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각자의 목소리가 내는 차이를 존중하며 두 개의 목소리로 공동 작업을 끝맺는 것이다. 그것은 대치하는 말들이라기보다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염두하며 나란히 걸어가는 말들의 뒷모습이다.

기획자 최혜영은 전시글에서 “서로를 대상화하지 않고 어떻게 관계맺을지 고민해나가는 과정”으로서&#38;nbsp; 전시가 만들어졌다고 썼다. 그 말 속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고민하며 시작된 만남이 단지 더 큰&#38;nbsp; 무엇을 위한 것만으로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스틸, 강정 Ghost sunrise’에서 올해로 강정에 온지 십년을 바라보는 활동가 혜영과 흑표범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강정 앞바다를 바라보며 멧부리를 걷는다. 그 짧은 산책길에서 둘은 멧부리의 과거 기억, 현재의 모습, 앞으로 변화할 모습에 대한 염려를 나누지만 대화의 대부분은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사들이 채우고 있다. “저쪽 앞쪽에 태양을 보러 가보자!” “와!” “가까이서 보면 더 예뻐!”

많은 현장이 장기화되는 시대라고들 말한다. 현장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많은 논란과 갈등을 목격하고 경험하기도 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다양한 말하기 방식이 필요하기에 현장은 예술가를 필요로 하지만 예술가는 때때로 당사자성과 정치적 올바름 앞에서 사건을 대상화하고 소재화한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서울에서 오신 예술가분들’이라는 극존칭 호명은 예술이 현장에서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 어떤 식으로 침범받을 수 있는지, 제지당할 수 있는지,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는지, 혹은 장난 취급받을 수 있는지 그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단어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에, 부딪히고 실수하고 갈등하고 다투고 후회하기도 한다. 장소를 침탈하고 현장을 밀어내는 공권력과 부당한 힘을 ‘불청객'이라고 부르며 만났지만 ‘불청객’이라는 말은 때때로 그곳에서 함께 싸우는 서로를 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단순했을 것이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 이를테면 ‘아, 저기서 내가 퍼포먼스를 하면 좋겠다!’, ‘여기서 흑표범 작가가 고스트 댄스를 추면 얼마나 센세이션할까?’ 고민은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현장과 장소와 사람들과 자연을 만나며 처음 생겨났던 마음을 다듬고 재질문하고 의심하고 고치고 확신하고 실행하는 과정. 반복되는 움직임과 목소리들로서 아직은 뭐가 될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어가기 위해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주춤하는 시간, 질문이 질문을 만드는 시간. 그 시간의 두께를 보여주는 전시 &#38;lt;불청객 Uninvited&#38;gt;은 퍼포먼스가 어떻게 스스로 구성되는지가 아닌, 퍼포먼스가 어떻게 해체, 분산, 노출, 실패하는지, 그 부서진 자리에서 어떻게 말하는 몸으로 돌아오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까지 어떻게 예술의 현장으로 가져올 수 있는지 사유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멀고도 가까운 거리에서, 가끔 멀어질수도 있지만 어딘가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는 동료가 있다는 생각만으로 혼자서도 걸어갈 수 있는 힘에 대한 이야기이다.

(암전)

글을 맺으려다 기지와 멧부리 사이의 현장에서 말과 말의 대치상태가 이어질 때 계속 들리던 소리, 조용하지만 낮고 길게 울리던 풀벌레 소리를 떠올린다. 전시장 한 켠 멧부리의 순비기 넝쿨을 닮은 종이풀이 누워 있었다는 것도 떠올린다. 인간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진 다음에야 동물, 그리고 식물, 자연, 사물 이렇게 순차적으로만 사고가 가능한 익숙함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이런 사고의 순서는 인간중심적인 글쓰기 방식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사유의 범주에 뭔가를 하나씩 추가할 때마다 나타나는 여러 비가시화된 권리의 전제들을 마주하게 하며 글의 마지막에라도 다른 목소리의 자리를 염두하게 한다. 이제부터는 가정법의 말들이다. 인간은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지만 돌과 땅과 흙과 오래된 나무의 수명을 기준으로 아주 긴 시간 속에서 돌아본다면, 잠시 ‘소리내고’ ‘움직이고’ 사라지는 짧은 장면의 일부일 것이다. 어쩌면 역사라는 긴 영화 속에서 찰나의 빛 같은 것일 수 있다. 그 짧은 순간 어떤 장면에서는 시위를 하고, 어떤 장면에서는 철조망에 현수막을 걸고, 어떤 장면에서는 맨몸으로 나무를 껴안고, 또 백팔배를 하고 또 기도를 하고 또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장면의 반복 끝에서 어떤 영화가 상영될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닐테지만, 나란히 걸어간 발자국들이 그곳을 향해 찍혀있길 바랄 뿐이다.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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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강정 Ghost sunrise, single channel video, 9min, 2022

*이 글의 제목은 리베카 솔닛의 책 &#38;lt;멀고도 가까운 The Faraway Nearby&#38;gt;(부제: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에서 가져왔다. 책 속에서 솔닛은 어머니와 딸 사이로 은유되는 창작자와 작업물 사이의 관계, 이야기를 만드는 현실과 현실을 만드는 이야기, 불가능해보이는 것과 변화가능한 것 사이의 거리, 나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 사이의 연결점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제목이 품은 의미들이 이 글에서도 적용되고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흑표범 개인전 &#38;lt;불청객&#38;gt;(2021) 비평글</description>
		
	</item>
		
		
	<item>
		<title>Text-우리의 우주의 강아지의</title>
				
		<link>https://sonustext.cargo.site/Text-6</link>

		<pubDate>Wed, 25 Jan 2023 07:37:34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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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우리의 우주의 강아지의


여기 눈앞에 있는 것들을 무어라 부를까. 이전의 이름으로는 더 이상 부를 수 없을 만큼 형체를 잃어버린 조각들. 길에서 주웠거나,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거나, 망가진 걸 고쳤거나, 깨진 걸 다시 붙인 사물들. 여기 놓인 존재들은 생과 죽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생과 죽음 사이 어디쯤 있을지 추측할 수 없다. 언제 소리 내거나 흔들리거나 다시 움직일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나뭇잎이, 종잇조각이, 비닐봉지가, 길고양이의 집이, 종이상자가, 찢긴 현수막이 그저 여기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것이 이름을 기억해낼 때까지 기다리거나 새로운 이름을 속삭이면서.

우-주-의-강-아-지- 
이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우주의 강아지’라는 이름을 읽는다. ‘의’라는 조사에는 스물한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대체로 앞의 단어가 관형어 역할을 하며 뒤의 단어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니 ‘우주의 강아지'는 소속이나 포함 관계로 해석해서 ‘우주가 소유한 강아지’ 혹은 ‘우주에 살고 있는 강아지'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주에 소속되어 있거나 우주에 있다는 의미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 모두 우주에 살고 있고, 우리 모두 우주에 속한 존재들이라면 굳이 그걸 한 번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우주는 너무 넓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면 그것을 둘러싼 작은 세계에서부터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디에서 태어났고 친구는 누구이고 집은 어디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등등. 그런데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이 무한한 시공간을 공간적 범주로 설명하니 어떠한 소속과 포함의 관계도 갖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언가가 우주에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한다’는 걸 암시하기도 하는 걸까. 너무 긴 시간과 너무 큰 공간 그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는 세계로서의 우주. 이런 생각들을 할 때쯤 어디선가 밝고 슬픈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녕, 우주, 생일 축하해"&#38;nbsp; &#38;nbsp;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휴게소에서 삼천 원 정도에 파는, 건전지로 작동하는 강아지 인형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다. 우주의 어딘가에서 태어났을 ‘우주의 강아지’는 지금 우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중이다. 우주보다 먼저 태어난 강아지가 막 태어나려는 우주를 바라본다. 우주의 강아지의 눈으로 보는 우주는 작은 것들로 가득차 있다. 씨앗이 태어나고, 조개껍데기가 태어나고, 마른 풀이 태어난다. 노량진 수산시장이 태어나고 이어서 농성장도 태어난다. 깃털이 태어나고 돼지가 태어나고 나뭇가지가 태어난다.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 로힝야 난민 여성들의 회복을 돕는 평화의 집 ‘산티카나’가 태어난다. 단풍잎이 태어나고 나뭇잎이 태어나고 나비가 태어나고 강아지풀이 태어난다. ‘다 잘될거야' 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미얀마의 소녀가 태어난다. 이 모든 탄생이 구겨진 종이 상자로 만든 무대 위에 자리를 잡고 나니 그것이 우주임을 증명하듯 한 마리 나비가 그 위를 회전한다. 탄생을 축하하듯 환영하듯 기뻐하듯 나비가 그 위를 몇 바퀴쯤 돌았을까.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주가 죽는다”. 태어난지 몇분 되지 않은 사물들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너무나 가볍게 있던 자리에서 뽑혀나가는 사물들이 보인다. 우주에서 다시 하나둘씩 존재들이 사라져간다. 우주 바깥으로 꺼내어진 씨앗, 마른 풀, 조개껍데기, 깃털, 산티카나, 미얀마의 소녀를 보며 우주의 강아지도 죽기로 결심한다. 작은 몸에 전구를 감고 가장 밝은 모습으로. 안녕. 

우주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우주의 강아지의 죽음. 이것은 공연 &#38;lt;우주의 강아지&#38;gt;의 서사이다. 우주의 강아지는 우주의 씨앗과 우주의 조개껍데기, 우주의 노량진 수산시장 등 우주에 태어난 작은 것들의 존재를 기억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우주라는 광활하고 먹먹한 세계 속에서 금새 사라지는 작은 존재들 곁에 ‘의'라는 한 점을 만드는 일이다. 우주의 강아지의 씨앗, 우주의 강아지의 조개껍데기, 우주의 강아지의 노량진 수산시장. 사라졌지만 기억한다면 영원한 시간 속에 머무를 것이라 믿으며 ‘의'로 연결되는 우주의 우리가 태어난다. &#38;lt;우주의 강아지&#38;gt;는 우주에 태어나고 사라져간 수많은 이름을 불러보고 함께 기억하는 ‘의'의 공동체를 만드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우주에는 수많은 존재들이 태어나고 사라지지만 기억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기억은 그것보다 조금 더, 혹은 영원히 이 세계에 머무르며 이야기를 쓴다. 기억을 회상할 인간이 사라진 이후의 세계에서 여전히 그 기억을 담지한 누군가가, 그리고 그 기억을 회상하게 해줄 사물들이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로민경은 스스로 기억하고 기억을 전달하는 사물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것의 첫 번째 삶을 애도하고 두 번째 삶을 축하한다. 언제 소리 내거나 흔들리거나 다시 움직일지 모를 사물들이 나비처럼 잠들어 있는 자리에서 오로민경의 작업은 마치 그 곁에서&#38;nbsp; 자장가처럼, 생일축하노래처럼, 진혼곡처럼 머무른다. 부서진 기억의 조각들 속에서 ‘우리'를 찾는 노래를 들으며, 함께 그 노래를 들을 친구들을 찾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강아지야 그 후에 이렇게 접는 거야. 우리들 사이에 시간이 있음을 잊지마. 우린 언제나 긴 시간 속에 있어. 영원한 시간. 영원한 사랑” 

나비가 강아지에게 보냈던 편지의 글자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나비가 강아지에게 접으라고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생이었을까. 마음이었을까. 눈물이었을까. 시간이었을까. 우리가 목격한 우주의 탄생과 죽음은 지나간 일들일까, 앞으로 펼쳐질 사건일까,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장면들일까. 저멀리 나비의 목소리를 따라 아득한 과거와 막연한 미래 사이의 시간을 접는 강아지가 보인다. 언젠가 긴 시간의 선이 하나의 점이 되는 순간을 볼지도 모른다. 그땐 영원한 시간과 영원한 사랑이 머물 만큼 안전하고 따뜻한 우주를 볼 것이다. 우주의 강아지의 탄생과 죽음. 이 짧은 공연 이후 우주의 우리는 다시 무수히 많은 탄생과 죽음을 목격하며 이곳에 남아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의'로 연결되는 무수히 많은 이름들을 이어보고 세어보는 일이 아닐까. 작은 행동, 작은 마음, 작은 존재들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며. &#38;nbsp;

우리의 우주의 강아지의 난민캠프의 세월호의 씨앗의 노량진의 나비의 로힝야 소녀의 …

&#60;img width="1500" height="1000" width_o="1500" height_o="1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7f7690229668b9f10e0c414df940031126a2397acd0dd3b1aba0e82182ac7e2b/00000000-7543-small.jpg" data-mid="169716626"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7f7690229668b9f10e0c414df940031126a2397acd0dd3b1aba0e82182ac7e2b/00000000-7543-small.jpg" /&#62;

오로민경 공연 &#38;lt;우주의 강아지&#38;gt;(2022) 비평글</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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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ext-생명연습</title>
				
		<link>https://sonustext.cargo.site/Text-5</link>

		<pubDate>Wed, 25 Jan 2023 07:35:28 +0000</pubDate>

		<dc:creator>sonustext</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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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생명연습을 사이에 둔 편지


안녕하세요, 지연 님. 산책하듯 함께 써보자는 초대의 말을 들으니 예전에 거북골근린공원으로 걸어가는 여정과 공원 안에서의 산책을 스트리밍하시던 날 저를 초대해주셨던 게 기억나네요. 스트리밍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한 핸드폰을 사용해, 새벽 5시 즈음 그곳을 이동하면서 채취한 소리를 전송하는 작업이었지요. 그날 새벽잠을 이기지 못해 함께 듣는 순간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다음날인가 지연 님이 보내주신 녹음 파일을 통해 시공간적으로 딜레이된 자리에서, 이미 지나간 산책길을 되짚어 갔었어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바람 소리, 이파리가 몸에 스치는 소리, 흙을 밟는 소리가 들렸고 저는 가만히 새벽 공기를 상상하며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는 제 머릿속에 그날 지연 님이 눈과 귀로 담아온 소리 이미지들이 잔상으로 남아 있어요. 수십 년이 지나고 만약 제가 그 공원이 있는 산에 찾아갈 일이 있다면 예전에 분명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고 착각할 것 같기도 하네요. 착각을 진짜라고 믿게 될 만큼 기억력이 나빠져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진짜가 아닌 기억은 무엇이고 진짜 기억은 어디에 있을까요. 끊임없이 보고 듣고 잊어버리는 세계에서 진짜 기억이라는 것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도 의심해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건네준 기억의 일부가 제게 씨앗처럼 이식되어 자라나고 번져 나가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룬다면 그 기억의 기원을 과연 찾아갈 수 있을까요. 분갈이하듯이 그렇게 이동한 기억 이미지들이 실제 기억을 물들이고 덧입히는 과정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같기도 하네요.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항상 촬영과 편집을 하고 있고, 그렇다면 만들어진 영화들보다 잊히고 사라지는 영화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사라짐으로 완성되는 게 영화라면’이라는 지연 님의 시 구절을 저는 이렇게도 생각해봤어요. &#38;nbsp;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는 지연 님이 과거에 뒷산을 걸으며 주로 ‘눈’과 ‘귀’로 기억한 것들을 다시 ‘손’이 연기하며 생성하는 이중의 기억인 것 같기도 해요. 그때의 몸과 지금의 몸 모두 지연 님의 몸이지만 눈이 경험한 것을 손이 이어받아 현재화하고 있는 것이고, 그 모습 속에는 손의 무의식적 기억도 들어 있겠지요. 손이 카메라 앞에 전면으로 등장하는 장면들은 마치 무언가를 만지고 만들고 싶은 마음이, 파괴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불가능한 순간을 예고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사라지는 손, 춤추는 손,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 따뜻한 손, 깃털같이 가벼운 손, 깃털이 되는 손은 역시나 같은 손이기도 한 파괴하는 손, 부수는 손, 망가뜨리는 손, 터트리는 손과 멀어지고자 여정을 떠나는 것 같았어요. 손바닥에 깃털을 태우고 날아가듯 움직이는 손의 장면에서 저는 새의 몸과 인간의 몸이 무해하게 만나는 순간을 상상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서로를 만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사유의 단계를 넘어 수행되는 순간. 신체의 일부이자 과거의 신체로, 생명의 흔적으로, 새의 기억 조각으로 남은 깃털을 만나는 순간. 저는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아요. 손의 여정에 대해 다음 편지에서 조금 더 나눠보겠습니다.&#38;nbsp; (2021. 10. 22 솔비)(중략)











*이 책은 &#38;lt;스크리닝 프로젝트 : 이야기꾼&#38;gt;(2021.8.3-8.7, 우란문화재단 우란1경)에서 상영된 김지연 작가의 영상 작품 &#38;lt;생명연습(Practice of Life)&#38;gt;과 연계하여 제작되었다. 작가는 영상 작업을 보지 않은 독자를 생각하며 이미지와 텍스트로써 책 속에 영상을 다시 상영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38;lt;생명연습&#38;gt;의 제작과정을 회고하며 동료와 나눈 교환서신, 작업을 예고하듯 지난 겨울과 봄에 뒷산에서 쓴 시, 워크숍의 기록을 재구성한 텍스트와 참여자들에게 보냈던 글, 그간의 듣는 작업을 돌아보며 쓴 스크립트로 구성되어 있다.&#38;nbsp;





&#38;lt;생명연습&#38;gt;(2022)
글: 김지연, 전솔비
편집: 김지연, 전솔비
편집 자문 및 교정 교열: 희음
제작지원: 우란문화재단(책 이미지)</description>
		
	</item>
		
		
	<item>
		<title>Text-1인실의 세계</title>
				
		<link>https://sonustext.cargo.site/Text-1-1</link>

		<pubDate>Wed, 25 Jan 2023 07:34:42 +0000</pubDate>

		<dc:creator>sonustext</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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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1인실의 세계



‘세계’라는 단어는 마치 거대한 모습을 지니는 것 같지만 일상 속에선 줄곧 ‘나’라는 말과 어울려 지극히 사적인 범주로 수렴하곤 한다. ‘나’의 몸을 거울 삼아 비추는 곳, ‘나’에 의해 분절되고 결합되는 이미지들의 조합, ‘나’를 둘러싼 문제계. 이처럼 ‘나의 세계’ 속에 거주하는 인간은 주관과 직관을 사용해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파악하며 이로 인해 ‘경험’이라는 것 또한 극히 우연적인 시공간의 마주침으로 귀결된다. 일부만을 지각해서 알아낸 일정 범위 내의 세계가 각자의 실재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알 수 있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어떤 곳을 향해 갈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각자가 감각하는 세계가 어느 하나의 공통된 이미지를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불확실하며 개별적일 도착점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각자가 발딛고 살아가는 세계의 실재에 가까울 것이다. 세.계. 이와 혀가 살짝 닿을 때 공기를 아주 조금 내쉬면서 발음되는 이 단어는 짧은 호흡과 함께 가볍고 힘없이 일상 속으로 빠져나간다. 

나의 세계라는 말을 다시 1인실의 세계라는 공간 속에 놓아본다. 더 작고 은밀하게 들린다. 글을 쓰는 지금 후덥지근하고 눅눅한 공기가 생각의 흐름을 끊고 더운 몸 속을 지나 머릿속의 내면까지 침투해오고 있다. 잠시 생각을 흘려보내니 몸은 이미 더위가 식은 밤공기 속으로 가있고 남미 어딘가에 있을법한 오래된 호텔 침대에 누워있다. 천장에는 먼지 쌓인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고, 거울로 비치는 테이블과 의자 등의 소품들은 단 한 명의 사용자를 고려해 최소한의 동선으로 이루어진 이 방을 구성한다. 한쪽 벽면에 난 커다란 창이 밤이 만드는 불빛과 바깥의 소음을 커튼 사이로 반사하고 있다. 같은 모습의 공간 속 각기 다른 호실에 머물며 내밀한 시간을 채워가고 있을 투숙객들의 모습을 벽 너머로 떠올려 본다. 타인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노크 후의 긴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 끝에 잠시 흘깃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타인의 1인실.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세계 속에 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개인이 감각하는 세계의 크기는 제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여러 겹의 막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각기 다른 막 안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감각하고 이해하며 지각하는 공간의 범주는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들은 각기 다른 개인의 공간 지각 능력과 방법론을 이용해 보이지 않는 것들로 세계를 가늠한다. 기후나 날씨라고 불리는 대기의 느낌이나, 공간을 탐구하고 공간을 이해하기 위한 신체의 움직임, 소리, 매체적인 면에서의 확장, 인간의 언어 밖의 세계들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압축된 일상성을 낯설게 재현하는 이러한 방식들은 부재하는 곳을 설명하려는 시도와도 비슷할 정도로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감각하는 얇은 막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결국 모호하고도 부정확하며 불확실하게 반복된다.

자연도 도시도 기후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만을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세계 속에서 유연하게 대응하는 나만의 방식이 만들어진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특정 예술 매체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 다음 단계에 대한 상상은 자신이 선택한 매체의 세계를 탐구하는 움직임과도 같다. 피부에 닿는 대기의 온도와 습도 등 촉각적으로 감각하는 세계의 느낌에 대한 예민한 자각과 그것을 소리와 색채로 표현하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시화하려는 또 다른 움직임이며 인간의 언어 밖의 세계에 대한 질문과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의 시도, 공간과 몸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움직임일 것이다. 압축된 세계의 일상성을 낯설게 재현하는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직 우연이 발생하지 않아서 적절한 시공간에 등장하지 못한 1인실의 사물들이다. 서로 다른 1인실의 세계들을 전시장 안에 접어두었다. 펼치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을 접어둔 1인실의 세계. 

짐 자무시의 영화에 등장하는 호텔방의 습습한 공기, 크리스 마커의 영상 속에 끊어진 시간의 망을 수선하는 고양이 인형,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안으로 굳게 잠긴 문고리가 나의 1인실의 세계에 들어갈 소품들이 된다. 감독 신카이 마코토는 “세계 世界라는 말이 있다. 중학생 무렵까지 나는 세계라는 건 휴대폰의 전파가 닿는 곳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라는 문장을 어느 장면 속에 적어둔다.
전시 &#38;lt;1인실의 세계&#38;gt;(2018) 서문
기획: 전솔비
협력: 김민관
작가: 강은구, 김지연, 신현정, 정찬민, 허윤경, SaC(안민욱, 이세승)
전시장소: 갤러리175&#38;nbsp;
주최: 갤러리175
후원: 분홍공장</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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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Text-녹는 땅, 고인 기억</title>
				
		<link>https://sonustext.cargo.site/Text-4</link>

		<pubDate>Wed, 25 Jan 2023 07:33:43 +0000</pubDate>

		<dc:creator>sonustext</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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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녹는 땅, 고인 기억



이곳을 ‘니-와’라고 부르던 목소리들이 사라지자 얼마 뒤 연못의 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돌을 쌓아 올린 웅덩이 아래에 이끼 대신 긴 풀이 자라나고 잉어가 헤엄치던 자리에는 풀벌레들이 숨어들었다. 움푹 파인 땅에 흙이 가득 쌓일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이곳을 ‘정-원’이라고 부르며 찾아온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그사이 숲처럼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을 적당히 솎아내고 빈자리에 파와 고추와 호박을 심었다. 예전엔 서울 곳곳으로 이동할 소금이 가득 차 짠 내음이 풍기던 창고에 옷과 이불이 쌓여 그 체취가 풀 내음과 함께 정원에 섞여 들어갔다. 나무를 다듬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가위로 천을 자르고 실을 엮고 미싱기를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을 가꾸고 동네 사람들의 옷을 수선하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돌보고 우물물을 길어서 다육식물들을 키워 시장에 내다 팔며 부지런히 자신과 집의 시간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흰 장미와 벚꽃이 자라던 자리에 붉은 장미가 피고 민들레와 강아지풀이 조금씩 비집고 들어와 사는 모습을 땅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끔 이곳을 부르는 말들이 ‘마-당’으로 바뀌기도 하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나누던 대화들이 두 나라의 언어로 오고 갔다는 사실과 수십 년 전에 폈던 장미와 지금 핀 장미의 꽃잎 모양이 조금 다르다는 사실은 이제 희미해져 갔다. 

사람들은 이곳을 피해와 가해의 역사가 얽힌 기억의 잔여물이라고 부르며 찾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이 집의 겉모습에서 얼마나 희귀하고 독특한 요소들이 남아있는지만 보고 떠났다. 폐허로 남거나 기념비로 남은 건축물들은 그것이 지닌 조형적 아름다움을 강조하거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들 이외로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집은 알고 있었다. 사료로서 특정 건축물들이 역사에 기입될 때 그곳이 특정 국적으로만 한정할 수 없는 누군가의 내밀한 기억을 품은 집이라는 사실과 그 ‘누군가’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은 쉽게 잊히거나 주변화되곤 했다. 그렇기에 문화주택과 적산가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축물로 기록된 이 집은 뒤편에서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의 뒤편에 자리한 정원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역사의 각주를 만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연못의 흔적으로 추측되는 자국 위에 피었다가 진 장미 넝쿨과 호박 넝쿨의 뒤섞인 줄기가, 아직도 마르지 않고 고여있는 우물물을 길어 올려 키워낸 다육식물들이, 거의 매일 찾아오는 고양이와 나비, 참새, 풀벌레들이 기억하는 풍경이 침략하고 삭제하고 빼앗고 빼앗긴다고 생각되는 역사 너머에서 서로 자리를 내어주며 살아가고 있었다.

김제원은 기록된 적이 없기에 부재한다고 여겨지는 집 뒤편의 역사를 감각하고 그곳의 풍경을 기록한다. 어릴 적 집 근처 바닷가에서 썰물 이후 작가가 목격한 땅의 풍경은 서울 후암동과 군산 신흥동의 두 집에서 찾아낸 정원 공간의 지형으로, 지표면과 종이와 기억이 기록되고 흔적화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김제원이 물에 녹는 종이에 그려나간 이미지들은 정원의 시점에서 바라본 집의 외피와 정원 곳곳의 시간들을 담고 있다. 그것들은 종이를 녹이는 물 위에서 수차례 흘러내리고 햇빛과 바람을 거치며 서서히 건조되고 마른다. 비가 오고 해가 날 때마다 마르고 젖기를 반복하며 종이는 땅을 이미지화하는 것이 아니라 땅 그 자체의 형태로 바뀌어간다. 그리고 땅이 종이가 되는 사이에 비가 많이 내려 정원에 풀이 무성해졌던 시간을 의식하듯 작가는 굴곡지고 두께가 부분적으로 불균등해진 종이 위로 풀처럼 이끼처럼 보이는 형상을 수놓아 풀의 기억을 한 번 더 덧씌운다. 이제 실과 종이는 함께 녹았다가 굳어서 하나의 덩어리로 엉키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기억의 지도를 완성한다. 두 나라의 실, 두 나라의 나무, 두 나라의 기억. &#38;lt;녹는 땅, 고인 기억&#38;gt;은 두 장소, 두 이름, 두 언어 사이를 왕복하는 이야기이다. 집은 오래전 나무였고 나무는 오래전 풀이었고 풀은 과거에 흙이었고 흙은 아주 오래전 집이었다. 전시는 ‘집’, ‘역사’, ‘기억’ 같은 말 대신 ‘풀의 자리’, ‘그림자’, ‘물웅덩이’라는 말로 쓰인 기록물이 역사가 될 수 있을지 질문하고자 한다.

&#60;img width="2835" height="3970" width_o="2835" height_o="397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eee106b2e85a23121c93dd0156386eb5495d8fb284a66fe4a719e4034c78832f/IMG_5371.JPG" data-mid="201524653" border="0" data-scale="74"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eee106b2e85a23121c93dd0156386eb5495d8fb284a66fe4a719e4034c78832f/IMG_5371.JPG" /&#62;

김제원 개인전 &#38;lt;녹는 땅, 고인 기억&#38;gt;(2021) 서문
기획: 전솔비
작가: 김제원
전시 장소: 사가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description>
		
	</item>
		
		
	<item>
		<title>Text-접힌 이미지의 바깥을 펼치며</title>
				
		<link>https://sonustext.cargo.site/Text-2</link>

		<pubDate>Wed, 25 Jan 2023 07:31:51 +0000</pubDate>

		<dc:creator>sonustext</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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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접힌 이미지의 바깥을 펼치며: 어떤 옷차림의 사람들

난민이라는 호명을 고민하며

누군가 ‘나를 난민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요청/요구해온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나는 난민이 아니다’라는 말과는 조금 다르게 들릴 것이다. 그 말은 난민이지만 그저 난민이기만 한 것은 아닌 누군가의 이야기가 여기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때의 응답은 단지 ‘난민’이라는 단어만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정체성과 그것을 결정짓는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에 국한해서만 이야기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이야기로 그를 인지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야기로 존재를 입증받길 원하는 목소리의 등장과 그동안 법의 언어와 미디어의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집단으로만 호명되어온 여러 삶이 발화하기 시작하는 흐름 속에서 말과 글의 영역에서는 난민을 주체로 한 여러 시도가 나타났다. 이 글에서는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등장하는 목소리들 뒤로 여전히 남아있는 ‘얼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목소리의 주인을 상상하거나 목소리의 얼굴을 마주 볼 때면 떠오르고야 마는 여러 이미지. 글과 말이라는 수단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특정 이미지. 나를 그런 이미지로 보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이 상상하고야 마는 바로 그 이미지는 눈앞에 마주한 얼굴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한다. 아마 목소리 없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단단한 하나의 얼굴을 깨부수고, 그 뒤에 감춰진 수많은 얼굴들을 보는 일이 아닐까. 호명의 문제는 무엇보다 시선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나를 난민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말에 응답하는 일은 눈앞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질지 모른다.


“때때로 한국 사람들은 ‘난민’을 직업이나 직함처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난민’이라는 단어가 한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해 버리는 것 같아요. 여기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늘 “난민, 난민”이라고 소개해요. ‘난민’이라는 단어를 먼저 언급하는 순간 이미 편견이 생겨요. 그럼 사람들은 그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거예요. 그들이 달라서가 아니라 ‘난민’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래요.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난민다운 옷차림’이라는 말

한국 사회에서 난민의 얼굴은 2018년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때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바로 난민의 겉모습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난민의 모습을 찍은 미디어의 사진에 가장 많이 달린 댓글들은 가장 먼저 이들의 ‘난민답지 않은’ 옷차림과 ‘난민답지 않은’ 겉모습을 지적하고 있었다. 난민이 왜 비싼 아이팟을 끼고 있냐고 묻고, 신발이 너무 깨끗하고 양복을 입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고 하며, 전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할 난민”이 아닌 표정을 짓고 있다고 의아해했다. 그동안 주로 참상의 현장에서 보도사진으로 찍힌 난민의 이미지를 ‘난민다운’ 모습이라고 인지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입고 혹은 더 잘 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가짜’ 난민이라는 의심이 들게 했으며 이것은 점차 난민 반대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몇몇 사람들만의 오해나 해프닝으로 그칠 것 같은 무지한 의심 같아 보이지만 낯선 타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그러한 물음들을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바꿔갔다. “난민보다 국민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은 점차 난민이라면 응당 정치적인 박해나 자연재해와 같은 생사의 문제가 걸린 상황으로 인해 한국에 도달했으나 그것이 경제적인 목적은 배제한 ‘순수한’ 사정이어야 하고, 종교적으로 위험하지 않거나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한국말과 한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범 시민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기대에 어긋나는 이미지들은 난민이 맞는지를 판별하는 시험대에 오르며 난민 반대 운동과 정부의 난민 정책은 ‘진짜’ 난민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그 속에서 안전하게 좁힌 난민 정체성이 법적 해결을 위해 필요한 사항이 됨에 따라 난민 인정과 난민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이 한때 이러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다. 하지만 옷차림이 너무 깔끔하다고 난민이 맞는지 의심하고, 노숙자보다 말끔하다고 난민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난민다운’ 이미지란 과연 무엇인가? 난민은 외양과 특정 기호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정체성인가? 난민은 옷차림으로 자신이 난민답다는 것을 표현해야만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계속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 심리적 안도감을 주는가? 무엇보다 겉모습만으로 그 사람에 대해 전부 알 수 있다는 오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접힌 이미지

“1994년 이후 2019년 8월까지 난민인정 신청에 대한 심사결정이 종료된 건은 2만 6천명이지만, 이 중 난민인정을 받은 사람은 964명이고,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은 사람은 총 2,145명”이다. ‘난민’이라는 단어 안에는 난민으로 호명되지만, 난민의 이름으로 살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난민 인정을 받기 위해 무기한 기다리는 사람,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고 한국에 남아 최소한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난민 인정을 받은 극소수의 사람,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해 한국을 떠나는 사람, 자취를 감춘 사람 등 다양하다. 이들은 법이 보호하는 범위도 다르고, 출신국도 종교적, 문화적 배경도 다르며 삶의 방향성도 다르지만 모두 ‘난민다움’이라는 좁게 접힌 이미지 안에 살아간다는 점은 같다. 이처럼 ‘무엇다움’이라는 영역 속에 좁게 접힌 이미지들이 ‘난민’뿐만인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는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탈북자, 장애인, 성 소수자, 국가폭력의 피해자 등 이미 난민화된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이 있다. 난민과 난민화된 삶은 분명 다르지만, 그 접점에는 각각의 정체성을 ‘무엇다움’에 구속하는 인식과 논리가 존재한다. 겉모습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잣대의 난점, ‘무엇다움’에 갇혀 살아가는 이들의 공통된 이미지들과 그럼에도 다른 개개인의 삶을 함께 사유하면서 좁게 접힌 이미지의 바깥을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최근 시각예술의 영역에서는 난민을 주제로 기존의 낡고 견고한 이미지 주변부를 확장할 수 있게 해주는 예술적 실천들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운동과 정치를 위한 이미지가 아닌 ‘무엇다움’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욕망과 삶의 문제를 다루는 이미지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난민의 옷차림, 난민의 겉모습을 둘러싼 질문들 속에 갇힌 실제 삶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시도들이 여전히 부족한 현실이다. ‘난민다움’이라는 말이 지닌 폭력성을 예감하면서도 그러한 이미지 바깥을 열어내는 작업을 발견하지 못한 실패의 시간 속에서, 이 글은 접힌 영역 그 바깥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재현의 시도를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그것은 ‘난민’보다 먼저 미디어와 일상적 편견을 통해 견고하게 굳어진 ‘이주노동자’라는 이미지가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에 틈을 내기 시작하는 시도이다. 옷차림과 겉모습에 대한 단단한 편견과 시선의 문제를 유쾌하게 비틀어 펼쳐내는 ‘이주노동자’ 재현의 사례를 통해 ‘난민’의 겉모습에 대한 상상을 이어가며 이 글에서는 무엇보다 ‘즐겁고 가볍게 일상과 접촉하는 힘’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중략)

&#38;lt;난민, 난민화되는 삶&#38;gt;(2020, 갈무리) 
공동저자:&#38;nbsp;김기남, 김현미, 도미야마 이치로, 미류, 신지영, 심아정, 심정명, 송다금, 이다은, 이용석, 이지은, 전솔비, 쭈야, 추영롱</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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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ext-안개,상자,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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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5 Jan 2023 06:37:4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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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안개, 상자, 입 : 은유의 아카이브


“이처럼 제가 다루고자 하는 영역은 이미 과도하게 다루어진 동시에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불건전한 의미에서 매력적이며 다른 의미에서는 혐오스럽고 가려져 있고 억압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처치 곤란한 것을 다루기 위해 어떤 작은 조각, 어떤 구체적인 것, 구체적인 세계에서 온 이미지가 필요했습니다.” -토니 모리슨

2021년 6월, 구체적인 세계로부터 하나의 이미지가 생성되었다. 그 이미지는 특정한 텍스트와 함께 움직이며 추상적인 말들 속에 갇힌 누군가를 현실로 불러냈다. 감시와 통제라는 이미지 생성 조건을 단번에 드러내는 이미지, 강렬한 이 한 장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여러 감정들이 빠른 속도로 현실의 이미지를 움직였다. 누군가는 이미지를 부정하기 위해 누군가는 이미지를 구출하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미지를 가져갔다. 그렇게 한 장의 이미지는 바깥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이미지의 현실은 그 방 안에 남아 있다. 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심리적 거리두기로 인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이들이 그 안에 남겨져 있다. 동시대의 난민, 이주민, 감염, 접촉과 격리, 감금과 보호, 타자와 질병의 문제는 관료주의적 수사형식을 매개로 복잡하게 교차하거나 맞물린다. 구금의 감각과 매개되어 인식되는 사건과 이미지들이 아카이브 리스트에 매 초마다 추가되고, 한 장의 이미지는 모든 것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모순 속에 삭제되고 있다. 

전시 &#38;lt;안개, 상자, 입 Haze, Chamber, Lips&#38;gt;은 구체적인 하나의 이미지가 촉발한 사유와 정동을 참조하며 이미 너무 많이 언급되었지만 여전히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그 이미지를 다시 한번 기록하고자 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구체성과 추상성은 실제 사건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혐오와 연대는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는가. 편견과 상상은, 매체 간 이미지의 전이는, 아카이브 내 이미지의 이주는 어떻게 서로를 참조하며 원본을 변형시키고, 오히려 그 변형 속에서 때로는 실재를 더 인식에 가까운 것이 되도록 만드는가. 전시는 오늘날 어떠한 수사의 형식과 은유가 특정 이미지를 볼 만한 이미지로 인지하게 하는지 그 조건들을 참조하며, 반복해서 언급된 ‘그 이미지’의 주변을 모으려 시도한다. 전시의 제목에 기입된 세 개의 단어는 전시를 출발시킨 한 장의 이미지가 잔상으로 남긴 파편적인 형상들을 은유하고 있다. 비가시성, 어둠, 바닥, 사각지대, 침묵, 그림자, 목소리 등. 수많은 은유로 변주될 수 있는 이 세 개의 단어는 ‘그 이미지’의 공간을 형상화하면서, 전시 공간을 구성하고, 다시 현실에서 은유로서 사용되는 이미지 조각들을 하나씩 불러낼 것이다. &#38;nbsp;

이다은은 이 전시에서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하는 영상 작업과 퍼포먼스 공연, 작업이 되지 못한 주변적 이미지와 작업을 만들기 위한 필드 워크 리서치 이미지들을 마치 하나의 성좌처럼 배열한다. &#38;lt;인덱스, 성좌&#38;gt;는 필드워크 리서치를 통해 얻은 이미지 데이터와 증언을 활용한 퍼포먼스 공연을 영상과 사운드 퍼포먼스로 재배열한 것이다. 1975년 부산에서 개소한 뒤 지금은 없어진 전 베트남난민보호소 라는 장소를 라이더 촬영한 이미지와 화성 외국인보호소에서 고문당한 M의 말을 피에조 센서 장치로 변형시킨 사운드는 무언가를 통해 매개되어야만 전달될 수 있는 변형된 이미지와 목소리의 간극을 형상화한다. 

이어서 퍼포먼스 영상과 사운드로 조합된 &#38;lt;은유의 변주들&#38;gt;은 감염병과 난민의 이동하는 은유적 이미지를 퍼포먼스라는 신체를 활용한 매체로 옮기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는 감금과 격리의 상황에서 강제되는 신체성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정동을 다루려는 의도이며, 언어화되지 못한 목소리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물리적 공간에서의 억압과 고립이 ‘인간’이라는 신체적(내적) 공간으로 전유되는 지점을 포착한 은유로서의 퍼포먼스는 전시장에서 상영되고 다시 전시 기간 동안 퍼포먼스 공연으로 환기된다.

이렇듯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한 작업들은 은유로서의 이미지들이 어떻게 신체를 활용한 매체로 다시 전이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감금과 격리의 상황이 야기하는 감각을 다루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물리적 공간에서 표출되는 억압과 고립이 인간이라는 신체적, 내적 공간으로 다시 들어갈 때 포착되는 은유는 어떻게 다른 것이 되는지 사유하며 작가는 퍼포먼스의 과정적 아카이브로서 연습영상과 회의록, 퍼포먼스 동작 연구 같은 주변적 자료들을 전시에서 가리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구 부산난민보호소 터 지도와 촬영 장면, 화성외국인보호소 내부 라이다 스캐닝 촬영 장면 같은 리서치 로서의 아카이브는 보도이미지, 웹상에서 범람하는 이미지, 데이터로 인지되는 이미지에 대한 접근방식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그것들은 난민이나 감염이라는 사건으로부터 기인하지만 조각나고 혼재되어 실재 사건으로 연동되지 않고 인식하기 쉽지 않은 은유로서의 이미지로 자리한다. 

점점 더 관습적이고 둔화되어 흘러가는 것, 맥락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공유되는 이 이미지의 이동은 현 상황의 접촉 불가능성, 그렇기 때문에 직접 연루되지 않고 안전한 지대에서 매체를 통해 접근하는 이미지 수용자와 실제 사건의 당사자와의 거리, 간극, 그리고 해결되지 못한 채 침수하는 과거의 사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와 결부된다. 이러한 아카이브들은 사후적으로 만들어내는 정동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38;lt;M에게 쓰는 편지&#38;gt;와 &#38;lt;현장 녹음 : 20211006 화성외국인보호소 면회실 앞&#38;gt;은 실제로 이미지와의 거리를 좁혀보려는 작가의 시도로서 이미지에 말걸고 이미지에 다가가려는 걸음들이 어떻게 단절되거나 분절되는지, 그리고 어떤 감정을 남기는지 드러낸다. 반면 &#38;lt;구속과 초록에 대하여&#38;gt;와 &#38;lt;personal color 연구 A&#38;gt;는 직간접적인 접촉 속에서 남겨진 흔적들이 어떻게 추상화되어가면서 감정만을 남기는지 젤 네일 아트의 재료를 사용하여 그 물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작가는 이러한 정동의 흐름과 강도를 기록하며 휘발되거나 사라지는 개인적 감정만을 보기보다는 그것이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연대의 움직임들을 포착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작년부터 이 이미지가 작동시킨 현장의 이미지 텍스트로 이어지며 현장 다큐멘터리 영상과 발언의 사운드들 속에서 다시 이 전시가 어떤 이미지를 구출하고자 했으며 어떤 구체성을 기억하고자 했는지를 환기하는 것이다.

“집 안에 있을 만한 것, 책을 걸 고리가 되어 줄 수 있는 어떤 것, 아주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했습니다. 제게 그 이미지, 그 구체적인 물건은 바로 재갈이었습니다.” -토니 모리슨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토니 모리슨의 글은 이렇게 다음 문장으로 이어진다. 발췌된 부분은 어린 딸이 노예로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딸을 죽인 실제 노예 여성 마가릿 가너의 이야기 &#38;lt;빌러비드&#38;gt;를 설명하기 위해 토니 모리슨이 쓴 부분이다. 노예제 시대에 흑인의 ‘말할 자유’를 막던 재갈을 언급하며 그 폭력적인 사물로부터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었는지를 통찰하는 부분이지만 오늘날 이 문장은 여전히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통제하는 이미지 속 누군가의 가려진 입을 떠올리는데에도 적절한 문장으로 중첩된다. 재갈의 은유가 왜 지금까지 남아서 적절히 다시 쓰일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다은 개인전 &#38;lt;안개, 상자, 입 Haze, Chamber, Lips&#38;gt;(2022) 서문
공동기획: 이다은, 전솔비
작가: 이다은
전시 장소: 온수공간
주최/주관/협력기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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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Photo-Text-fug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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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6 Feb 2023 06:56:4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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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fuga


&#60;img width="1098" height="694" width_o="1098" height_o="694"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27428d51cef8ed73495a9a4ae96f4116d7c62077a5bbea6e73b9426625403a14/Title_page_of_The_Art_of_Fugue.jpg" data-mid="169719059"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27428d51cef8ed73495a9a4ae96f4116d7c62077a5bbea6e73b9426625403a14/Title_page_of_The_Art_of_Fugue.jpg" /&#62;

이탈리아어 fuga의 어원은 라틴어로 쫓다의 의미인 fugare및 쫓기다의 의미인 fugere이다. 즉, 한 파트가 다른 파트에 이어서 멜로디를 모방하는 것이 쫓고 쫓기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름지어졌다. 푸가는 비유하자면 일종의 돌림노래와 같다.
 

&#60;img width="1500" height="996" width_o="1500" height_o="996"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9070e294f7391516bde2e8bbd955f8344824acaa7f85ccdd7cef73531047e980/Fuga-5.jpg" data-mid="169719057"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9070e294f7391516bde2e8bbd955f8344824acaa7f85ccdd7cef73531047e980/Fuga-5.jpg" /&#62;

2016년 여름, 아이치 트리엔날레를 보러 일본 나고야 지역에 가게 되었다. 그 후 그곳에서 찍어온 여러 사진들 중 유독 한 장의 사진이 계속 잔상이 남는다.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이 새와 다시 시선을 마주친다. 사진을 찍던 순간 정확히 새의 두 눈은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어떤 말을 건넬지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 새가 지금 나를 관찰하고있는 걸까.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니, 그것보다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60;img width="1500" height="996" width_o="1500" height_o="996"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8f43369998b20fdf908deb7c812c43fcb619a0ba717b81ecc22238fe08d64b4f/Fuga-4.jpg" data-mid="169719056"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8f43369998b20fdf908deb7c812c43fcb619a0ba717b81ecc22238fe08d64b4f/Fuga-4.jpg" /&#62;
Brazil의 작가 Laura LIMA는 2008년부터 작업해온 &#38;lt;Fuga&#38;gt;를 2016년 나고야에서 선보였다.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남아있는 4층짜리 건물에 작가는 일백여 마리의 새들을 풀어놓았다. 한 때 사람을 위해 건축된 이 건물은 작가에 의해 새의 시선에 맞도록 재제작되었다. 커다란 새장 속에 갇힌 새들.
 &#60;img width="1500" height="996" width_o="1500" height_o="996"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50f5d0a47ce0443595835c801a8a0c491ccc4876575ef0bfe6f46c8d2415e4be/Fuga-3.jpg" data-mid="169719055"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50f5d0a47ce0443595835c801a8a0c491ccc4876575ef0bfe6f46c8d2415e4be/Fuga-3.jpg" /&#62;


Fuga는 영어로 run away나 flight로 해석된다. 도주, 도망, 하늘에서는 비행의 의미가 될 것이다. 사실 이 공간의 그물망은 느슨하게 짜여있어서 실제로는 새가 충분히 탈출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하늘이 그리운 새 한 마리가 시도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가더라도 새들은 이곳으로 다시 도망온다. 먹이가 있고, 안전하며, 아름다운 둥지가 있는 곳. 그렇게 새장의 문은 열려있는데 새들의 수는 줄지 않는다. 

&#60;img width="1500" height="996" width_o="1500" height_o="996"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d9a016180d586b9ef793b5ce3911c3511ff774634c2261ff5daafb5a738d9133/Fuga-2.jpg" data-mid="169719054"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d9a016180d586b9ef793b5ce3911c3511ff774634c2261ff5daafb5a738d9133/Fuga-2.jpg" /&#62;

거대한 새장 속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한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린다. 내부가 좁아서 한 번에 10여명씩 제한된 수만 입장할 수 있다. 나올 수 있음을 전제로 한, 갇힌 공간으로의 자발적 입장. 미지의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 뭔가 신기한 광경을 관람할 것을 기대하고 계단을 올라간다.
 &#60;img width="1500" height="996" width_o="1500" height_o="996"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94ef05d7f2376cc0cfa252ef582a92ac82ef7cc824675daa0413cb03887064b0/Fuga-0.jpg" data-mid="169719051"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94ef05d7f2376cc0cfa252ef582a92ac82ef7cc824675daa0413cb03887064b0/Fuga-0.jpg" /&#62;


새에겐 거대한 새장이 인간에겐 작다. 새의 시선에 맞춘 공간에 들어가는 건 불편한 일이다. 사람들은 이동할 때마다 자꾸만 이곳저곳이 부딪힌다. 새들은 영역을 침범한 방문객의 눈 높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눈 가까이까지 날아와 눈을 정면에서 쳐다보기도 한다. 구경, 관람하기 위해 들어온 곳에서 관찰당하는 사람들. &#38;nbsp;


새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는 새장 속에서 인간의 시점은 극적으로 변한다. &#38;nbsp;시선이 쫓고 쫓기는 좁은 공간이 만들어진다.&#38;nbsp;
&#60;img width="1500" height="996" width_o="1500" height_o="996"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83dc2940b031aaffb2c69642549104b2e314304091ca4c39dd87c725061d5e81/Fuga-1.jpg" data-mid="169719052"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83dc2940b031aaffb2c69642549104b2e314304091ca4c39dd87c725061d5e81/Fuga-1.jpg" /&#62;


재미있는 건 곳곳에 그림이 있다는 것이었다. 새들을 위한 풍경화나 산수화이다. 새들은 그림을 밟고 그 위를 걸어다니며 흩뿌려진 먹이를 먹기도 하고 그 위에 배설물을 남기기도 하며, 때때로 그림을 쪼아보기도 한다. 새들이 그림을 보는 방식이다. 


산수화 속에는 사람도 동물도 보이지 않는다. 새들이 상상할 수 있는 새장 바깥의 막연한 세계가 창문처럼 새장 곳곳에 세워져있다.


그 속에서 나는 문득 홋카이도의 한 산에 위치한 동물원을 떠올렸다.
 &#60;img width="1500" height="1000" width_o="1500" height_o="1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8c3dd6e4564fe9075233a154d8ff6355c11200ee91ddd36bf4f76a5ddc8b5e3d/-1.jpg" data-mid="169719044"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8c3dd6e4564fe9075233a154d8ff6355c11200ee91ddd36bf4f76a5ddc8b5e3d/-1.jpg" /&#62;


눈 속에 파묻혀서 하얗게 변한 동물들의 이미지가 선명해진다. 관찰자의 위치전환에서 온 지나간 기억의 복기. &#38;nbsp;
&#60;img width="1000" height="667" width_o="1000" height_o="667"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c32f17d2d0f381693521dfdaa7ee5f3447e06f9c2c91ecaa087205b4363548e3/.jpg" data-mid="169719045"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c32f17d2d0f381693521dfdaa7ee5f3447e06f9c2c91ecaa087205b4363548e3/.jpg" /&#62;


존버거는 1977년에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 라는 글로 &#38;lt;본다는 것의 의미&#38;gt;에 대한 성찰을 시작했다. 


‘동물은 몰이해라는 좁은 심연의 건너편에서 인간을 뚫어져라 본다. 이것이 왜 인간이 동물을 놀라게 하는지의 이유이다. 하지만 동물 또한 - 비록 길들여진 것이라 할지라도 - 인간을 놀라게 할 수 있다. 인간 또한 유사한, 그러나 동일하지는 않은 몰이해의 심연 건너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그가 어디를 보건 마찬가지이다.’

&#60;img width="1500" height="1000" width_o="1500" height_o="1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ff1c73b954b10d7d9c0d42f201ce353e53bdb46356638e8af1da9003ef2112f6/.jpg" data-mid="169719049"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ff1c73b954b10d7d9c0d42f201ce353e53bdb46356638e8af1da9003ef2112f6/.jpg" /&#62;

이 사진에서 눈에 띄는 건 캠코더를 들고 펭귄을 보며 웃고있는 남자의 표정이다. 

펭귄의 움직임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영상을 찍고 있다. 하지만 펭귄은 남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60;img width="1500" height="1000" width_o="1500" height_o="1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840bafce0fcae36efaba8e7806a54728af0795d1e5fee665adff4b02bbfa4b64/.jpg" data-mid="169719043"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840bafce0fcae36efaba8e7806a54728af0795d1e5fee665adff4b02bbfa4b64/.jpg" /&#62;


‘그 동물들이 인지하게 되는 것으로서, 그것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들이 자연상태에서 보이게 되는 반응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그림으로 그려진 대평원만큼이나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시선은 늘 어딘가에 달라붙으며 그것이 반복되면 대상에겐 노동이 된다.&#60;img width="1500" height="1000" width_o="1500" height_o="1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4a7faee72e7356778af3fd626b02e472b78d2571d2df9d697d4cb50ae4e331c6/.jpg" data-mid="169719042"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4a7faee72e7356778af3fd626b02e472b78d2571d2df9d697d4cb50ae4e331c6/.jpg" /&#62;

동물원에 오래 지내며 인간의 시선에 익숙해진 동물들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거부한다. 


인간을 바라보지 않거나, 바라보더라도 그 시선은 공허하다. 

&#60;img width="1000" height="667" width_o="1000" height_o="667"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10285a463b67fc33821694f0cff082385d57a771d4497c9c420fcae3c1d0a504/.jpg" data-mid="169719050"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10285a463b67fc33821694f0cff082385d57a771d4497c9c420fcae3c1d0a504/.jpg" /&#62;

그렇다면 프레임 바깥을 알지 못하는 동물들에게 나는 그저 가끔 움직이는 배경일 뿐일 것이다. 나라는 주체는 의식하지 않는 대상에 의해 실체가 없는 배경의 일부가 된다. 


인간은 무수히 많은 시선을 보내지만 보낸 시선을 결코 되돌려받지 못한다. 부착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시선들. 그래서 누군가는 타자성에 대해 스며들지 못하는 것, 타일적인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부수되는 이념에서 동물은 언제나 관찰하는 대상이 된다. 동물들이 우리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의미를 상실해 왔다.’

&#60;img width="1500" height="1000" width_o="1500" height_o="1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35465753e805816bd6f341c59960a57a54e45887ccb9f016facb3f34aaa76ff9/.jpg" data-mid="169719048"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35465753e805816bd6f341c59960a57a54e45887ccb9f016facb3f34aaa76ff9/.jpg" /&#62;

동물원에도 새장이 있었다. 아주 견고한 새장이었다. 
비행, 도주, 도망을 꿈꾸는 동물원의 새들의 눈은 늘 바깥을 향해 있다.&#38;nbsp;
&#60;img width="1500" height="1000" width_o="1500" height_o="1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8e2145f9b9330297f36b873123fb6e78e2e0f33ee9966f8b3ac46abb0807304a/.jpg" data-mid="169719046"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8e2145f9b9330297f36b873123fb6e78e2e0f33ee9966f8b3ac46abb0807304a/.jpg" /&#62;


거대한 새장 속에서 구경을 끝낸 사람들은 관찰당했다는 기분을 안고 잠시 생각에 잠기지만, 이내 가뿐한 마음으로 이곳을 나간다. 다 보았다고 말하면서 뒤돌아 계단을 내려간다. 미술관이나 동물원이나 영화관을 나올 때도 같은 말을 한다. 


다 보았다. 
우리는 정말 다 본 것일까. 
&#60;img width="1500" height="1000" width_o="1500" height_o="1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c00c7b3a75abe8adb0a1037ebfe691fe9f353dd9cba4e1e2d122b177d39a0e0b/1.jpg" data-mid="169719047"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c00c7b3a75abe8adb0a1037ebfe691fe9f353dd9cba4e1e2d122b177d39a0e0b/1.jpg" /&#62;

푸가에서는 하나의 선율이 다음에 올 모방을 허용하며 계속해서 도망친다. 시선도 그렇게 어딘가에 붙지 않고, 혹은 붙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까. 관찰의 대상 주위를 부유하기만 하는 관찰, 혹은 관찰의 대상을 소모시키지 않는 관찰.

잠시 고민하는 동안, 아직 보지 못한 다음 사람이 계단을 올라온다.
&#60;img width="1500" height="1000" width_o="1500" height_o="1000" data-src="https://freight.cargo.site/t/original/i/0090be8e17f32d077c62d5f5ee4c4e0563fc333b767b74dc48a0e312a045a51a/sky.jpg" data-mid="169719058" border="0"  src="https://freight.cargo.site/w/1000/i/0090be8e17f32d077c62d5f5ee4c4e0563fc333b767b74dc48a0e312a045a51a/sky.jpg" /&#62;</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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